대통령 부인들 (3)‘부드러운 직선’ 정치인 배우자 롤모델로
밖에선 사랑·봉사 흠뻑 안에선 자상한 아내로
어린이·보건사업 열정
청와대 안주인 몫 톡톡

현모양처면서 ‘혁명한 사람 아내’로서 현실감각 갖춰

육영수 여사는 정치인 배우자의 새 모델을 만들어간 인물이었다. 현모양처형이면서도 현실정치나 사회현상을 평가하며 그 현장에 뛰어든 패기 있는 여성이었다.

1925년 학식 있고 재력 있는 아버지 육종관씨와 어머니 이경령씨의 1남 3녀 중 차녀로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서울 배화여고에 유학한 후 20살부터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 가사교사로 1년3개월 재직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2월 박정희 중령과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5·16 ‘군사혁명’에는 육영수 여사도 동의한 정황들이 있다. 그는 ‘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몫을 다하고자 했다.

이후 전 비서관 김두영씨가 목도했듯이 정치외교사, 국사, 영어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강의를 저명한 대학교수들로부터 매주 들음으로써 정치와 사회문제에 새로운 안목을 넓혀나갔다. 당시 청와대 출입 아나운서였던 강영숙 예지원장은 육 여사가 “여기자, 여성 방송인들과의 많은 교류를 통해 말하는 법, 표정 관리, 화장과 옷차림새 등에 관해 우회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문을 종종 구했다”고 회상한다.

의장 공관 시절 육 여사의 커다란 임무는 민원 처리였다. 제자이면서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이었던 정재훈씨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 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 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게 했다”고 전한다.

여성언론인들의 모임인 ‘여류방송인클럽’을 청와대에 초청해 담소를 나누는 육영수 여사.
▲ 여성언론인들의 모임인 ‘여류방송인클럽’을 청와대에 초청해 담소를 나누는 육영수 여사.
연 3000명 접견…청와대 안주인의 덕과 우아함 갖춰

그는 일찍이 교사의 덕목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연 3000여명을 접견하는 중 보여준 그녀의 재치 있는 대화와 알맞은 제스처, 우아한 몸가짐은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정씨는 “이 분은 혜안이 있으셨고 모든 것을 통찰하는 듯한 남다른 점을 볼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육 여사는 “의례적이거나 형식적이질 못했다.” 김두영씨는 “일에는 거의 완벽주의자로, 선명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풀고 넘어가는 성격”이라고 전한다.

한번은 아버지를 미화한 기사를 보고 “옥천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염려하며 “필자에게 바로 잡아드려라”고 비서관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여사는 늘 웃는 얼굴로 누구에게든 10년 지기를 만난 듯 반갑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것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품성”인 것 같다. 부속실 직원이 영부인에게 칭찬의 말이라도 하면 “속에 없는 말 하지도 마”라고 대꾸하여 웃기고, 심기 불편한 직원이 보이면 탁구를 치자고도 권하여 마음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지독한 야당’

남편의 군정 연장 의지 꺾어

대통령의 결정을 바꾼 육영수 여사의 위상에 대한 예 한가지를 들어본다. 박 의장이 1963년에 군정 5년 연장을 미 대사에게 전격 선언하여 정국은 혼미해지고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일어나며 미 국무성도 군정 연장 반대 성명을 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육 여사는 이동원 대사를 불러 군정 연장 취소를 박의장에게 설득하도록 도움을 청했고, 결국 박 의장의 마음을 움직여 군정이 종결되었다. 육 여사는 한계점을 알았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아내를 “지독한 야당”이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육영수의 죽음은 박정희 말기 내리막길 통치에 제어장치가 풀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1966년 9월 30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연설을 마친 박 대통령에게 육 여사가 한 농부의 진정서를 전해주고 있다. 육 여사는 이처럼 자신이 챙길 수 있다면 사소한 민원이라도 챙기고자 최선을 다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 1966년 9월 30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연설을 마친 박 대통령에게 육 여사가 한 농부의 진정서를 전해주고 있다. 육 여사는 이처럼 자신이 챙길 수 있다면 사소한 민원이라도 챙기고자 최선을 다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장·차관 부인들로 양지회 결성해 본격 봉사활동

주부 대상 각종 체육대회 개최도

육 여사는 1964년 장·차관 등 사회지도층 부인들이 참여하는 봉사단체 양지회를 만들고 10여년간 활발하게 움직였다. 적십자 수요 봉사활동, 헌혈운동, 정신박약 어린이 돕기에 열정을 보였고, 수재 모금을 위한 ‘사랑의 열매’ 달기 가두행사에서 열매를 육 여사가 직접 달아주면 시민들이 즐거워했다. 월요 경로회에서 노인들의 시중을 드는 젊은 육 여사의 서민적인 풍모는 친근감을 주었다. 그의 옷차림은 조끼, 어깨띠, 걷어올린 소매, 앞치마, 반소매 원피스 등으로 보기에 경쾌했다. 또 농어촌 문화개발사업, 양지회 장학사업 등을 조용히 추진했다. 여성의 바깥활동으로 어머니들이 참여하는 영부인 컵 쟁탈 정구대회, 탁구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 각종 경기도 장려하였다.

한편으론 경제성장이 정치적 과제였던 시대에 영부인의 활동영역도 이 큰 과제에 병행했다. 파월장병 위문활동, 새마을운동 후원 등 경제 재건과 관련된 성격의 사업이 따랐는데, 이와 같은 활동의 배경에는 “자선보다는 생활기반 마련”이란 생각이 깔려 있었다. 경제적 지원보다 국수 만드는 기계라든지 노끈을 만드는 기계를 마련해주어 스스로 땀 흘려 정당하게 벌 수 있도록 자세 전환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30여 년 역사 육영재단, 어린이대공원 등 지속사업 

육 여사의 대외활동은 항구성을 가진 지속적인 사업에 중점을 두어 갔다.

1968년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를 설치했고, 어린이를 위한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69년 4월에 설립하고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의 건립을 주도했으며, 부산 어린이회관은 72년 기공되었다.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여 농어촌 어린이에게까지 배포하고, 73년에는 불우청소년의 직업보도를 위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였다. 강영숙 예지원장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아나운서로 비교적 잦은 교류를 가졌던 그녀에게 성인교육과 한국전통 문화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인 예지원 설립을 1년여 준비하게끔 귀띔했다는 것. 그러나 개원 한달을 앞두고 육 여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나환자촌·수해현장 등 전국의 현장 직접 뛰며 챙겨

전국 한센환자(나환자)촌을 골고루 방문하여 자활사업을 지원했고, 64년 9월부터 월남에 파병된 장병 가족을 찾아 위로·위문하는 한편, 풍수해 현장에 비를 맞으며 달려가 재난당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사당동 난민촌, 교도소, 전방초소, 탄광촌 방문 등 영부인은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고려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인자한 어머니’, ‘생각하는 주부’, ‘공부하는 생활인’ 등의 주제로 좌담회를 갖는 일에도 바빴다. 김두영씨에 따르면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는 이런 활동은 영부인으로선 파격적인 것으로, 그 전에도 후에도 없던 일”이었다.

“누가 나를 해치겠느냐. 내가 대통령도 아니고…” 

1974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의 영구차를 떠나보내며 애통해하는 박정희 대통령.
▲ 1974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의 영구차를 떠나보내며 애통해하는 박정희 대통령.
8·15 기념식장에서의 죽음은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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