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역 소화하는 김성녀 연기력에 갈채

나는 솔직히 말해서, 모노드라마가 다소간 부담스럽다. 연극은 현실과 비슷하게 사람들 서로간의 관계를 다루기 마련인데, 이를 혼자서 감당하자니 자칫 부자연스럽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혼자의 내면세계를 그리는 경우가 아닐 때에는 일인다역이 불가피해지는데, 이 역시 자칫하면 배우들로 하여금 과장하기 쉽게 만드는 요건이 된다.

그러나 힘든 만큼 욕심 많은 배우들로서는 이에 도전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꼭 모노드라마를 해야 명배우 반열에 드는 듯이 여기는 풍조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주제적으로 볼 때, 대체로 넓은 의미에서 애정 문제나 성차별 문제에 국한된 경우가 많아 다소간 식상하다. 물론 그 문제들이 인간에게 있어 중요하고 또 이 시대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사회 문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성이 주인공인 모노드라마들이 너무나도 이에 집중되어 있는 듯한 감이 든다.

이런 선입견을 전제로 했음에도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배삼식 작, 손진책 연출)은 참으로 볼만했다. 다섯 살 소녀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이 겪는 이야기를 다양한 상대역들과 함께 소화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모두 26역을 해냈다고 한다. 특히 남자 역할을 할 땐 그녀가 마당놀이에서 익힌 남성역할 경험들로부터 얻은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주제가 이데올로기 분쟁으로 인해 40년간 벽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아버지를 둔 여인의 일생이고 보니, 가정비극적 측면이 좀더 두드러지기는 한다. 그러나 김성녀는 물론 그를 뒷받침한 연출자 손진책의 문제의식과 장인적 솜씨가 돋보인다. 아버지가 벽 속에 숨어서나마 가족의 생계를 돕느라고 밤마다 남의 눈을 피해 여장을 하고 짰던 베필에서 고른 모시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뽐내는 화사한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원래 이 작품은 프로그램에 분명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스페인의 실존인물을 소재로 일본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쓴 것. 배삼식은 이를 마치 창작극 같은 분위기가 살아나도록 번안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적이라 해도 원작자의 이름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냈더라면 좋았겠다. 초연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자면, 이 연극의 원작 공연을 12년간 200회나 이끌었던 하루카제 히토미도 김성녀의 열연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소녀가극단 ‘다카라츠카’ 출신이라서 하루카제 역시 춤은 물론 남성 역할도 거뜬하게 해냈으리라고 짐작이 가는데, 원작공연에서는 후라맹고 춤이 나온다고도 했다. 원작가로서는 원작대로 무대에 올리기를 희망했던 모양인데, 한국의 관객들과 김성녀에게는 지금의 번안공연이 좀 더 편안하다.

김성녀로서는 첫 모노드라마인지라 두고두고 손질해서 재차 무대에 올릴 것 같은 예감이 적중하여 대구, 의정부 등지를 포함하여 벌써 여섯 번째 공연을 맞이한다고 했다. 날로 익어가는 그의 연기, 특히 단순한 화극이 아니라 노래극이라고 할 정도로 동요로부터 민요(러시아 민요 포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지는 노래들을 약간의 춤 동작을 곁들여가며 맛깔스럽게 소화해내는 그의 호흡에 갈채를 보낼 만하다.

요정이 들려주는 동화의 주제가 극 전체와 꼭 어울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12달 모두를 긍정적으로 살아가라는 암시는 오랜 세월동안 벽 속에 갇혀 있다가 사면되어 처음으로 남의 눈치 안보고 바깥세상을 걷는 노부부의 노래가사에서 엿보이는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연극의 주제를 생각하면 십분 이해가 된다. 아울러 그림자극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 극중극은 긴장을 완화시키는 한편, 관극 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감내한다.

감히 이 연극을 보고도 연극에, 김성녀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삶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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