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부인들 (2) 신사참배반대운동 한 모친 기질 그대로 물려받아
남편하야 후 리더십 발휘…피압박자 울타리로

공덕귀 여사 좌담회에 박영숙 이현숙, 이은주 ,  양은선, 이정옥 씨가 참석했다.
▲ 공덕귀 여사 좌담회에 박영숙 이현숙, 이은주 , 양은선, 이정옥 씨가 참석했다.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으로 1년8개월간 영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의 삶은 여사의 자서전 출간에 깊이 관여했던 이현숙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의 말대로 “영부인 이후의 삶이야말로 본래의 리더십을 충분히 발휘한 삶”이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총재에 따르면 “교회 활동과 해위(윤보선 대통령의 호)의 반독재 투쟁으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민주화 인권운동의 리더십을 한껏 발휘했다. 여사와 운동을 함께 한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도 “공 선생 말씀에 따르면 자신이 영부인이었다는 게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에게 힘이 되기 때문에, 또 그것이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자신이 안 나설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전한다.

사회의식·독립심 강한 어머니가 역할모델

공덕귀는 1911년 4월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씨와 방말선(공마리아)씨의 5녀 2남 중 둘째딸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35세에 혼자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에게는 용감하고 자랑스런 어머니였다. 공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호주 선교사들과 성경 공부나 찬송을 배우는 등 교류가 많았으며 동네 여인들은 그의 성경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일이 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서 일생 주님을 위해 일했다. 공덕귀는 믿음의 여장부인 어머니의 뒤를 밟으며 호주선교회와 더불어 학창시절의 외연을 넓혀나간다.

인도선교사를 꿈꾸던 팔방미인 최우등생

그는 별난 데 관심이 많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는,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호주 선교사는 그에게 늘 좋은 멘토였다. 공덕귀는 유치원 조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 선생을 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의 꿈은 인도 선교사였다.

21살의 늦은 나이에 호주 선교부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원했던 미션스쿨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으로 ‘만 가지 약장수’로 불렸고,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까지 휩쓴 최우등생이었다. 호주 선교사 부인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선교사를 따라 가 있던 거창에서 금지된 곡을 교회 행사 때 불렀다 하여 5일간의 감옥생활을 겪은 이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활기 넘치게 4년간 신학공부를 했다.

동문인 박용길 선생(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과 같이 주일학교를 인도했다. 졸업 후 29살에 송창근 목사의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한국교계의 거목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들과 인연을 갖는다. 이곳에서도 공덕귀는 황금동교회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다시 송 목사의 제의로 요코하마 공립신학교(후에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 4학년에 정규생으로 입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김천으로 와서 그해 8·15를 맞았다. 송 목사가 곧바로 사직을 하고 상경한 후 공덕귀는 12월29일 상경, 다음해 1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 신학의 대가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구속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울구치소 뒷산에서 구속자 가족 등 관계자들과 함께 부활절 새벽송을 부르고 있는 모습.
▲ 구속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울구치소 뒷산에서 구속자 가족 등 관계자들과 함께 부활절 새벽송을 부르고 있는 모습.
프린스턴신대 장학금 획득…결혼으로 유학 무산

교직에 있으면서 공덕귀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 생겨 프린스턴 신학부 전액 장학금을 확보하고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송창근 목사가 유학서류를 빼돌려 유학은 무산된다. 이 무렵 3년 전부터 말이 오가고 있던 윤보선(해위)씨와의 재혼 자리를 여러 목사들이 권했고, 해위 자당께서도 사람을 주기적으로 보냈다. 유학의 기회를 놓친 그를 주변에서 결혼의 길로 몰아갔고 친정어머니도 좋아라 하셨다. 김재준 목사만은 공여사의 마음을 헤아려 40년 동안 공든 탑을 무너뜨릴 생각이냐 하시며 마음을 돌이키려 애썼다.

“1949년 1월6일, 안국동 8번지로 귀양을 왔다.”

신학자가 되려고 했던 공덕귀 여사는 법도와 예절이 중시되는 명문대가의 생활 속으로 완전 방향전환을 하는 나날을 보냈다. 윤씨 가문은 초대교회 기독교 가문으로, 시아버님은 윤치소 장로이시고 시어머님은 예수교에 입문하여 9남매에 딸린 70명의 대식구를 위해 믿음과 은혜로 자기희생의 부덕을 보이신 ‘인간문화재’ 같은 분이었다. 공덕귀 여사 스스로 “살림은 제로였으나 시어머님은 아무 내색 안했다”고 말한다.

39세에 상구를 낳고 부산 피난 중 42세에 동구를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남편이 서울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고 공덕귀 여사는 술회했다.

20개월의 청와대 생활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해위가 대통령이 되자 보안상 이유로 안국동을 억지로 떠났다. 이후 1년8개월은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지냈다. 정치에 참견도 하지 않았고 일체의 봉사활동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주부의 자세를 가졌다. 외교적 방문객이 있을 때 우아한 자태로 손님과 환담을 나누는 활동은 많이 볼 수 있었다. 영국대사 부인의 방문, 매카나기 미국대사 부인과의 환담, 유엔군 모범장병 초대만찬, 미 국무장관 등의 예방시 영부인의 역할을 품위있게 해냈다.

YWCA에서 주관하는 외교관 부인들의 ‘가든 클럽’(Garden Club) 연차 전시회에 참석하고, 메디컬 센터의 아동병원 개설에도 영부인으로서 참석했다.

밤낮 없는 데모, 민주당의 능력 상실, 점차 무엇인지 모를 불안한 시국을 보며 그는 “주여, 이 백성을 어찌하시렵니까?”라며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5·16 새벽 3~4시, 공여사도 깨어 있었다. 국방장관의 전화를 받은 해위가  “어머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조카사위 집으로 가라”고 했다. 장도영 참모총장으로부터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해위만 남겨둔 채 떠났다. 생명의 위태로움을 경험했다.

“오, 하나님! 이 백성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총칼로 나라를 송두리째 차지하다니.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해위는 계엄 추인을 3일 만에 하고, 5월19일 밤 단독으로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군사위원회측은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부재는 국제관계상 절대 안된다”고 극구 제지했다. 대통령은 당분간 그대로 머물기로 하여 9개월을 흘려보냈다.

유신체제 하 시국사건에 대한 투명한 ‘공개재판’을 촉구하는 부채를 들고 시위 중인 공덕귀 여사(가운데).
▲ 유신체제 하 시국사건에 대한 투명한 ‘공개재판’을 촉구하는 부채를 들고 시위 중인 공덕귀 여사(가운데).
해위의 하야와 대선 실패…정계 은퇴로 이어져

해위는 62년 3월22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노모를 모시고 청와대를 떠났다. 공 여사는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 할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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