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흑자주빛 꽃잎 이보다 더 고울수는 없다

할미꽃은… 사실은…

하늘나라 공주랍니다. 천상에서 아주 큰 죄를 지어 이 땅으로 숨어 내려온…

하늘나라 임금님은 딸을 떠나보내며 말했답니다.

“사랑하는 딸아… 이제 세상에 내려가면 사람들에게 네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되느니라… 그리고 앞으로는 이 흰 비단실로 머리를 감싸 할미처럼 보이도록 하거라….”

천상에서 지은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외로운 형벌을 받은 것일까요?

그러나 그 죄는 공주님 탓이 아니었답니다.

공주님은 너무나 아름다워 누구라도 그 얼굴을 한번만 보면 사랑이라는 마법에 걸리고 마는 것이었지요. 아무 일도 못하고 공주님 얼굴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임금님은 어쩔 수 없이 공주님을 아래 세상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때부터 얼굴을 숨기고 아래만 아래만 쳐다보아야 하는 운명이 시작된 것이지요. 공주님은 지구별 사람들이 그 마법에 걸리지 말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 가에 거처를 정하고 이름도 할미라 하였으나… 하얀 비단실로 감싼 살결은 실크보다, 벨벳보다 더 부드러워 스치는 바람과 풀들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찌하나요….

우연히 공주님 얼굴을 훔쳐본 풀각시가 그만 그 마법에 걸리고 말았답니다.

- 풀각시의 할미꽃 이야기-

최근 할미꽃이 귀해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던 식물인데 요사이는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로 구경하기가 힘들어졌다. 야생화 바람을 타고 사람들이 다 캐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한겨울에 나는 할미꽃의 마법에 걸려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지난해 5월 가입하고 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어느 분이 할미꽃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할미꽃은 처음이고 또 너무너무 키워보고 싶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으려고 인터넷을 뒤져 정보를 찾고 이리저리 시도해 보았다. 할미꽃은 씨앗을 채집하면 바로 파종을 해야 한다. 씨앗이 완전 숙성되면 발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씨앗을 받자마자 나는 반은 뜰에 바로 뿌리고 반은 플러그 트레이(계란판처럼 오목오목하여 흙을 채워 파종하는 도구)에 뿌려 두었다. 마당에는 행여 누가 밟을세라 금줄까지 쳐 놓았지만 끝내 싹을 틔우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플러그 트레이에 뿌린 것은 100% 발아, 잘도 자라주었다. 모종이 한 10cm쯤 되었을 때 이를 다시 반은 뜰에 옮겨 심고 반은 봄에 뜰이 자리잡아가는 것을 보고 옮기기 위하여 50여개의 화분에 심어 두었다.

11월부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마당의 할미들도 서리꽃으로 변했다. 할미는 추위에는 엄청 강하기 때문에 얼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무래도 화분에 있는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일부를 실내로 들여놓기로 하고 20개 정도의 화분을 현관으로 들여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완전히 말라 누렇게 된 잎 사이로 파릇파릇 새 잎이 돋아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여 햇빛 잘 드는 창가로 옮겨 두고 며칠을 지나니 연초록 이파리 사이에서 팥알같이 생긴 발그레한 무엇이 내밀고 있지 않은가. 꽃봉오리였다. 따뜻한 실내에서 봄이 온 줄 착각하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할미는 완전히 내 마음을 앗아가고 말았다. 밖에 외출해도 그 모양이 아른거리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할미들 앞에 앉아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지금 할미들은 교대로 계속 꽃망울을 맺고 터뜨리며 꽃잔치를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할미가 이렇게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식물인지 몰랐다. 포도주로 목욕하고 나온 듯 촉촉한 흑자주빛 꽃잎은 어찌나 섹시한지…. 그뿐인가…. 꽃과 잎을 감싸고 있는 하얀 솜털은 어찌나 매끄럽고 부드러운지 천상의 실로 짠 비단 같다.

이 겨울 풀각시는 할미꽃과의 사랑에 취해 어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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