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쓰던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다. 마치 껌이 치맛자락에 들러붙듯 영어로 된 알 수 없는 메신저가 뜨더니 지우면 또 올라오고 지우면 또 올라오고 하여 인터넷은 물론이고 문서도 작성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집요한 스토커가 따라붙듯 했다. 아이는 나한테 엄마가 컴퓨터를 무식하게 써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며 주말이 되면 모든 파일을 백업시켜놓고 다시 깔아준다 했다.

나는 그 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아무튼 청소를 깨끗이 해서 나쁜 먼지가 들러붙지 않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버렸다. 그 애는 단순히 시간이 많이 드는 노동일이라고 했다. 컴퓨터의 구조도 기초도 모르는 채 그저 필요한 것만 써왔던 나는 이해가 안됐지만 아이가 대단해 보였다. 아부하듯이 칭찬을 해주니까 자신은 요즘 애들의 평균 수준도 안된다고 한다. 드디어 아이는 밤을 새워 내 컴에 있는 자료를 디스켓에 백업해 놓은 뒤 프로그램을 새로 깔고 그 파일들을 다시 입력시켜 주었다. 오랜 장맛비가 갠 듯이 그 스토커 같은 메신저는 떠오르지 않고 속도도 빨라지고 아주 좋아졌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자료를 찾다보니 중요한 폴더가 통째로 보이지 않고 사진 파일도 어느 기간이 빠져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에게 다시 구원을 청하니 복구가 불가능하다며 자신이 완벽하게 일을 못한 것을 미안해 했다. 가끔 작가들이 장편소설 원고를 날려 버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 대단한 작품도 아닌데 그리 애석해 할 일도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물건을 잃어버릴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뇌 속에 있는 기억의 칩이 빠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과정으로 손상되어 영원한 미궁 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리며 피곤감이 몰려 왔다. 

 새해를 맞아 명절상을 차린다고 시장에 가는데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품목이었다. 껍질 벗긴 녹두, 숙주나물, 고사리나물, 시금치, 양지머리, 돼지고기 다진 것, 느타리버섯, 미나리….

 작은 종이에 쓴 메모를 들여다보며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내 머리를 안정시켜 주었다. 어쩌면 단순한 듯한 그 낱말들이 헝클어진 감각을 되살리고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편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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