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우리들의 김장 여행

“나 겨울김장 했어요.” 요즘 나의 큰 자랑이 됐다. 내 손으로, 그것도 강원도의 산골 무공해 배추밭 옆에서, 또 게다가 치악산 언덕에 김장독 파묻고 넣어두었다는 사실. 자랑거리 아닌가?^^

그보다 더 큰 자랑은 여럿이, 더군다나 김장 담가보지 않은 초보자들이 한데 모여 산골 화가의 집에 하룻밤 묵으며 함께 배추 절이고 무채 썰고 속 버무려 넣기까지 모든 과정을 축제처럼 치러냈다는 흐뭇함. ‘김장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난번에 썼듯이 무공해 배추 얻으려 강원도 원주의 산골 황둔리에 살고 있는 화가 김만근씨 댁에 주말 나들이를 했다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맛있는 무공해 배추가 너무 아까워 우리라도 김장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싹텄고 이왕이면 즐겁게 ‘여럿이 모여 김장 해보자’로 의욕이 솟았고 그러다가 ‘아예 배추밭이 있는 강원도 산골로 와서 맛좋은 지하수로 담가 이곳 산언덕에 파묻어두자’로 비약했던 것이다.

이 각박하고 바쁜 세상에서 친구 여럿이 함께 김장해서 묻어두고 겨울 내내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만 해도 황홀한데 우리들은 그 다음주말 과감히 결행에 나섰고 멋지게 겨울김장을 해 넣었다. 감격.

11월 마지막 주말인 24일 금요일 저녁 늦게 저마다 바쁜 업무를 마치고 7명의 여성 동지와 7살 어린이 등 8명이 자동차 2대에 나누어 타고 야반여행에 나서 밤12시에 모두 현장에 도착했다. “우와--하늘의 별 좀 봐, 이렇게 많을 수가….”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큰 방에서 함께 자고나니 하늘이 새파란 너무나 아름다운 산촌의 토요일 아침. 우리 김장일꾼들은 재료 챙기는 일부터 바쁘게 시작했다. 이미 부탁해둔 배추 100여 포기가 마당 한쪽에 비닐로 감싸여 있었고 무는 집 앞의 밭에 그대로 심어진 채 비닐로 덮여있었다. 화가에 기자, PD, 사진작가, 광고디자이너 등 쟁쟁한 일꾼들이지만 그러나 일행 7명 중 김장을 제대로 해본 사람은 겨우 두 명. 모두 의욕만 가득 찬 초보들이었다. 하지만 이날 우리들은 ‘평생 처음’ 정말 어마어마하게 해냈다.

준 고랭지에서 자란 무공해 배추라 5시간만 절여도 정말 나긋나긋 맛있게 절여졌다. 무채 양념은 단순하게, 새우젓으로만 했고 집 앞의 밭에 나가 보랏빛 갓을 따다 섞었다. 그리고 조그만 동치미 무도 한아름 뽑아다 김장 사이사이에 박았다. “무맛이 기막힐 거요.” 김장 재료 준비를 해주었던 동네 농부께서 김장독까지 파묻어주며 “절대 양념을 많이 하지 말라”며 자연의 맛을 강조했다.

“아이고 하늘 좀 봐요. 너무 파랗다.” 저마다 바쁘게 손을 놀리다가도 경치에 감탄하고 “보쌈 새참 안 먹어요?” 농담 던지며 정말 유쾌하게 하루 꼬박 팔다리 허리 뻐근하게 김장놀이를 한 기분이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는 이렇게 모여서 왁자지껄 김장을 하는 이 ‘한국적’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을 잇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대량으로 김장을 하는 우리 풍습이 참 좋은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이 들수록 김치가 더 맛있어지듯이 김장하는 일도 우리 어머니들의 추억처럼 점점 그리워지는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