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실패백서' 만들어
국민에게 참회부터 해야...

10·25 재보선 참패 이후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정계 개편의 블랙홀로 급속하게 빨려들어가고 있다. 우리당 간판을 내리고 ‘헤쳐 모여’ 식으로 통합신당을 추진해야 한다는 ‘당해체론’과 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을 끝까지 사수하면서 당을 리모델링해야 한다는 ‘당사수론’이 충돌하고 있다. 여기에 범여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건 전 총리는 기존 정당에는 참여하지 않겠으며 중도개혁실용 세력을 아우르는 국민통합 정당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는 대선이 가까이 오면 정계개편이 어김없이 대두되었다. 87년 대선에서는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가 수용되자 야당은 김영삼의 통민당과 김대중의 평민당으로 분열되었고, 김종필의 공화당이 창당되면서 ‘1盧3金’의 대선 구도가 만들어졌다. 92년 대선을 앞두고는 민정당(대구경북), 통민당(부산경남), 공화당(충청) 등 3당이 합당해서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평민당을 고립시키는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97년에는 대선을 목전에 두고 철학과 뿌리가 전혀 다른 김대중(호남)과 김종필(충청)이 DJP연대를 통해 한나라당(영남)을 배제하는 정계개편을 성공시켰다. 2002년 대선에서는 재벌 개혁 세력과 재벌 본류 세력인 노무현과 정몽준이 후보 단일화라는 기상천외한 카드로 정계개편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한국판 정계개편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첫째, 이념과 뿌리는 무시된 채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대선을 앞두고 한탕주의식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특정 이슈나 정책이 아니라 지역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오로지 정권만 잡으면 된다는 기회주의적인 발상으로 지역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했던 측면이 강했다. 셋째, 한국 정당정치 운영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간판만 바꾸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한마디로, 한국 정치가 합리적이고 생산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소프트웨어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껍데기만 바꾸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개편이 주를 이루었다. 문제는 이러한 한탕주의식 정계개편이 가져온 결과가 참담했다는 것이다. 국민은 없고 오로지 기회주의적인 정치꾼들만이 판을 쳤던 정계개편은 집권하는 데는 유용했는지 모르지만 통치 실패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87년 이후 출범한 모든 정권들이 예외 없이 실패했던 이유는 이와 같이 독(毒)이 든 정계개편의 과실을 겁 없이 따 먹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는 망국적인 지역갈등이라는 저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잘못된 정계개편으로 ‘국민 우선의 정치’가 아니라 ‘국민 고통의 정치’가 일상화되었고,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민주주의가 오히려 퇴보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비극이 숨어 있는 것이다.

지난 4차례의 대선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잘못되었다고 사망선고를 받은 ‘기형적인 정계개편의 모델’을 여권이 고압적인 자세로 또 다시 들고 나오고 있다.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정당의 존립 이유라고는 하지만, 현재 여당이 보이고 있는 뻔뻔함과 교만함의 행태는 비난받기에 충분하다. 여권은 정계개편을 거론하기 전에 우선 국정 실패와 국민 분열에 대한 참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당이 왜 실패했는지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우리당 실패 백서’를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우리당은 실패한 좌파와 지역주의가 결합하는 식의 허황된 정계개편에 도취되기 전에 자신들의 철학과 역사의식을 새롭게 다듬는 참회와 고백의 길을 우선적으로 걷기를 바란다.

북핵 실험, 개성 춤판, 386 간첩단 사건, 민노당 북한 방문 등 일련의 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요즘 진정 나라를 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암울한 일제하에서 조국을 위해 몸 바치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의 곁을 떠난 윤동주 시인이 남긴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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