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여성이 희망(하) 한국 여성 정치 어디까지 왔나

여성신문은 창간 18주년을 맞아 향후 우리 사회 경쟁력의 열쇠를 쥐고 있는 ‘여성’을 새롭게 조명해 비전을 제시하는 연재 기획시리즈 ‘여성이 경쟁력이다’를 마련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과학·기술, 스포츠 등 각 분야 여성인력의 조건과 역량, 지원책을 제안하고 논의하는 장을 펼칠 것이다.

이번 순서는 ‘한국정치, 여성이 희망’ 두 번째 편으로, 두 개 면에 걸쳐 싣는다. 첫째 면에서는 한국 여성정치인 1호 ‘임영신’부터 최초 여성 국무총리 ‘한명숙’까지 한국 여성정치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고, 세계 여성 지도자들의 여성 리더십을 통해 여성 정치인의 성공 조건을 모색해 본다.  

올해 3월 헌정사상 최초로 여성 국무총리가 탄생했고, 여성 정치인이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여성정치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여성정치는 여전히 ‘과도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기 여성 정치인들이 ‘남성에 의한 간택’으로 정치에 입문했다면, 지금은 할당제 등 ‘남성의 배려’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쓴 소리가 여전하다.

‘여성 총리 시대’를 넘어 ‘여성 대통령 시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 한국 여성정치의 질적 도약을 위한 과제는 무엇일까? ‘임영신’부터 ‘한명숙’까지 역대 여성 정치인들이 일궈온 여성정치 진화의 역사를 통해 한국 여성정치의 새 길을 모색해 본다.

임영신·박순천·김옥선씨 

‘금녀의 벽’ 깬 선구자 역할

여성정치인 1호는 단연 임영신(1899~1977)이다.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정당인 ‘대한여자국민당’(1945~61)을 만들었고, 광복 직후 가장 핵심 부서였던 상공부(산업자원부 전신) 초대 장관으로 활약했으며, 이듬해인 1949년 1월 제헌국회 보궐선거에 당선돼 한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됐다. 여성 최초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1952, 1960)하기도 했다.

그는 여장부 중의 여장부로 통했다.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한 날 부하직원들이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어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결제 서류를 들고 가 고개를 숙이겠느냐”고 쑥덕거리자 “나는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이상으로 활동했다. 나에게 결제 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지금 당장 책상을 정리해 보따리를 싸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초의 여성 당수는 박순천(1898~1983)이다. 63년 민주당 창당(재건)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당 총재로 선임됐고, 65년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을 누르고 단일 야당 민중당의 대표로 선출됐다. 6·25전쟁 때 서울을 지킨 ‘공’으로 폭넓은 민심을 얻어 2·4·5·6·7대 국회의원 선거에 잇달아 당선돼 지금까지도 한국의 여성 정치인 일인자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는 남성 의원들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공격하면 “나랏일이 급한데 언제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고 거침없이 되받아친 여장부였다. 하지만 ‘금녀의 공간’에서 겪은 고충은 말로 다 못했다. 당시 국회에 여자화장실이 없었는데, 박순천은 한번 국회에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물이 들어간 음식은 아예 먹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가장 소외됐던 시기는 박정희 정권으로 대표되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18년 동안 여성 장관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당시 유일한 지역구 출신 여성 의원이었던 김옥선(7·9·12대 3선)은 아예 남장을 해 여성적 정체성을 부인했다.

소설가 정이현은 모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83년 열한 살 무렵 김옥선 의원을 처음 봤는데 양복에 와이셔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갖춰 매고 있어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정치는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여자가 정치가가 되려면 남자 옷을 입어야 하는구나, 아예 남자가 되어야 하는구나, 이렇게 짐작했을 따름이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당시 여성 정치인들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 정치’를 펼쳤지만, 남성 정치인의 필요에 따라 선택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들의 개인 역량이 전체적인 여성정치 역량의 확대로 이어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성정치세력화 운동 ‘약발’

장관·당수·총리 탄생 일궈

90년대까지도 한국의 여성정치는 ‘태동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92년 14대 국회에서 지역구 출신 여성 의원은 옥중에 있는 남편을 대신해 보궐선거에 출마한 현경자가 유일했고, 15대 때는 언론인 출신의 임진출, 법조인 출신의 추미애 2명뿐이었다. 전국구(비례대표) 여성 의원도 7명에 그쳐 97년 국제의회연맹(IPU)이 발표한 여성 의회진출 순위에서 한국은 107개국 가운데 94위로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0년에 접어들면서 여성정치는 일대 도약기를 맞는다. 16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이 5.86%(16명)로 소폭 상승한 데 이어, 17대에는 14%(42명)로 10%를 넘어서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지역구 의원도 16대 5명에서 17대 10명으로 무려 2배가 늘었다.

늘어난 숫자만큼 여성 의원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17대 국회 전반기에 이미경 문화관광위원장, 김희선 정무위원장, 김애실 여성위원장 등 3명의 여성 상임위원장이 탄생했고, 2004년 3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박순천 이후 41년 만에 두 번째 여성 당수 자리에 올랐다. 최근에는 전재희 한나라당 의원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됐으며, 2004년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 박근혜·김영선 한나라당 의원에 이어 올해 전여옥 의원이 ‘여성 할당’ 없이 자력으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고위직에 진출하는 사례도 늘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참여정부 첫 내각에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한명숙 환경부 장관, 지은희 여성부 장관 등 4명의 여성장관이 배출됐고, 올해 3월에는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탄생이라는 쾌거도 안았다.

이러한 여성 정치인의 성공 뒤에는 여성단체의 역할이 컸다. 94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한국여성유권자연맹 등 56개 단체가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를 결성한 데 이어, 17대 총선을 앞둔 2003년 8월 321개 단체가 모여 ‘총선여성연대’를 발족해 법·제도 개선을 위한 다양한 연대활동을 펼친 것이다. 뒤이어 발족한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여성 후보 101인 지지운동을 벌여 여성의 당선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여성단체들은 정당의 여성 관련 활동이 전무한 상태에서 여성 어젠다를 개발하고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등 정치권 밖에서 ‘대안정당’의 몫을 톡톡히 했다.

구태정치 관행 답습 여전

할당제 의존 벗어나야 할 때

그러나 갈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여성 의원들도 있지만, 일부의 경우 명령조의 위압적 발언을 일삼거나 특히 대변인을 맡은 여성 의원들이 필요 이상으로 정쟁을 주도하는 등 남성들의 구태정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해 정치에 입문했는데, 의정활동은 기존 남성정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성정치의 역량 확대는 요원한 일일 뿐이다. 

할당제에 대한 의존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성할당제 도입으로 문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에게 ‘주어지는’ 자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한 여성 의원들이 너도나도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도적 배려에 만족하기보다는 지역구 출마 등 ‘홀로서기’에 눈을 돌려야 한다.

정치인으로서의 프로의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발탁될 경우 경험 미숙으로 재선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성 의원의 경우 남성보다 지지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실패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많은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중앙정치로 가겠다는 욕심을 내기보다는 지방정치부터 차곡차곡 경험을 쌓아 전문적인 정치 지도자의 길을 걷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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