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인왕산의 달밤

보름달을 구경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유난히 달이 좋았던 올 추석, 나는 친구 몇 명과 인왕산에 올라가 기막히게 깨끗한 달과 함께 그야말로 아름다운 밤을 보냈다. 어두운 밤에 도심 산에 올라 달구경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선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기에 그 감동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인왕산의 달 대단해요.” 이웃 사직동에 살고 있는 후배가 추석 달구경을 인왕산에서 해보자고 했을 때 나는 솔직히 밤의 인왕산에 조금 겁을 먹고 있었기에 머뭇거렸다. 서울 청와대 근방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속성이랄까, 삼엄한 군 경비에 익숙해 과연 밤에 인왕산에 올라도 되나? 군 경비초소가 우선 떠올라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에요. 저는 요즘 거의 매일 개 데리고 밤에 올라가는데 무섭지 않아요.”

그래서 성사된 한가위 달마중. 5명의 여성 동지가 가볍게 배낭 메고 밤의 인왕산에 올랐다.

과연, 중도에 만난 경비초소 군인들은 오히려 우리 쪽에서 “아저씨, 커피 마셔도 되지요?” 말을 걸었을 정도로 순한 이웃 청년 같은 수줍은 자세들이었다.

울창한 숲 사이로 군데군데 조명등이 비추는 층계길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 저절로 걷고 싶어졌다. 등산로가 밤에도 이렇게 잘 돼 있다는 흐뭇함에 산길 오르는 일이 더없이 가벼웠다.

인왕산의 등산로 층계.
▲ 인왕산의 등산로 층계.
그러다 중턱쯤인가, 갑자기 나무들 지붕이 벗겨지더니 돌산 등성이 층계 목에 다다라 하늘이 확 뚫렸다. 얼른 달을 찾아 목을 돌리는데 아, 서울의 야경! 그것까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와아-” 우리는 합창하듯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반짝이는 빌딩 숲 위로 하얀 달이 적당한 위치에 균형 맞춰 떠 있었다. “아직 돌아보지 않았어야 하는데… 더 올라가야 인왕산 절경을 만나게 되거든요.” 이 정도 높이에서 보는 야경과 꼭대기에서 보는 야경이 천양지차라면서 후배는 우리 발길을 재촉했다.

입구에서 1시간도 못 걸었는데 마침내 산꼭대기 같은 넓은 바위가 나타나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두 서서 달과 서울을 내려다봤다. 한가위 달님의 힘인가, “서울이 참 아름답네.” “우리 참 좋아졌어.” 저마다 덕담을 쏟아냈다. 흉물스럽다고까지 했던 빌딩과 아파트들이 보름달 아래 촉촉한 눈동자처럼 빛을 내며 어느새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밤에 아무렇지 않게 산에 오를 수 있는 도시가 세계에 얼마나 되겠어요?” 자연환경, 도시건설, 치안상태까지 우리들의 추석 달맞이는 서울예찬으로 이어졌다. “정치만 잘하면….” 까르르 한바탕 웃었지만 마음은 더없이 너그러워졌다.

툭 터진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라, 인왕산 위에서의 그 너그러움을 다시 맛보고 싶어 오는 11월 첫 주말 인왕산 보름달을 구경해야지 벼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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