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위기 대중속에서 풀어야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그러나 인문학 계열 지원자가 줄어든다거나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다는 등의 수치들만이 인문학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거부감을 느끼고 멀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고 실천적 학문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인문학을 어려운 학문으로 여기지 말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길을 가르쳐 주는 생활의 지혜로서 가까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철학아카데미’의 이정우 원장은 “인문학이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학문이므로 위기란 있을 수 없다”면서 “올 여름 철학아카데미에 사상 최대 인원이 등록한 것을 보더라도 인문학을 배우려는 사람은 많이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인문학자들이 전통적인 내용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 문제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며 대중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이 새로운 담론들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문학 부흥운동을 주도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인문학이 길러주는 ‘공감’의 능력이 바로 글로벌 시대에 타인에 대한 관용과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키워주는 힘”이라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각종 부정이 터지면서 MBA 출신들을 더 이상 우대하지 않게 된 미국 기업들이나 9·11 테러 이튿날 밤 예일대의 유대계 미국인 학생들과 무슬림 외국인 유학생들이 함께 철야기도를 했던 사건 등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 2006년 10월 1일 오후 5시, 서강대 강의실

“바타유는 에로티즘을 금기의 위반이며 인간적인 행위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동물적 성행위와는 다른 내적 체험이라는 것이죠.”(21세 여성, 학생)

“그런데 그의 주장에는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구절들이 있어요. ‘여자는 남자의 욕망을 건드려 욕망의 표적이 되려 한다’라고?”(33세 여성, 프리랜서)

“그건 여성 비하적 발언이라기보다 당시의 시대상과 연결시켜 인류학적 관점에서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33세 남성, 학원 강사)

철학 전공자들의 토론 풍경이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저서 ‘에로티즘’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주인공은 철학공부 모임 ‘장미와 주판’의 회원들.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라는 ‘장미와 주판’은 지역별로 철학강독과 토론 모임을 열고 3∼4일 동안 마라톤 토론을 벌이는 ‘독서여행’ 등을 통해 철학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대학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고 있는 한편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현재 대안적인 인문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단체·기관은 10여 개. 본격적인 교육기관에서부터 카페를 거점으로 한 자유로운 소모임까지 다양하다. 대안 배움터의 효시로 여겨지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아카데미’는 92년 문을 연 이래 2만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했으며, 2000년 8개 과목 60여 명의 수강생으로 시작한 ‘철학아카데미’도 현재 30여 개 과목에 400∼500여 명이 몰릴 만큼 규모가 커졌다. 왜 이들은 자격증이 나오거나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일까.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2004년부터 ‘장미와 주판’의 철학공부 모임에 참여해 온 정지영(33)씨는 “인문학 공부는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말했다. 국문학과 4학년생인 이창규(25)씨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천편일률적인 수업들로는 충족되지 않는 욕구가 있었다”면서 “밀도 높은 인문학 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고 얘기했다.

‘풀로 엮은 집’ 설립 초기부터 2년간 서양미술사, 현대미학, 한국철학, 교육론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는 강문식(37·청원고 사회과 교사)씨가 느끼는 효과는 좀 더 현실적이다. 그는 “해가 갈수록 가치관의 차이가 벌어지는 학생들과 소통의 어려움을 겪던 차에 인문학 공부를 한 뒤 다양한 관점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면서 “이제는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풀로 엮은 집’의 정윤수 사무국장은 “학점과 리포트를 위한 백화점식 강의가 아닌 밀도 높은 인문학 강의를 원하는 대중의 수요가 꾸준히 있더라”면서 “교수들이 학생들의 존재론적인 문제를 의미 있는 의제로 설정하고 같이 의논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