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호박과 사랑에 빠진 날
시골 살아 좋은 것은 먹거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은 소쿠리 하나만 있으면 된다. 봄에는 민들레, 씀바귀, 고들빼기… 먹을 수 있는 풀이 얼마든지 있으니 끼니때마다 나가 한 소쿠리 뜯어 무쳐 놓으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여름에는 상추 오이 고추 따다 고추장 푹 찍어 먹고, 감자 나올 때는 감자 캐서 졸여 먹고 삶아 먹고…. 서울 손님들 내려와도 뭐 맛난 것 대접할까 고민할 필요 없이 푸성귀 한 소쿠리에 고추장 한 종지 내놓으면 맛있다는 곳 다 찾아다니는 미식가들도 ‘최고다’ 하면서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한다. 여기에 디저트로 자연산 딸기 한 접시 곁들이면 호텔 디너파티가 울고 간다. 딸기는 씨를 뿌린 적도 없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뜰 한 귀퉁이에 자라기 시작하더니 제법 퍼져 여름이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매장에서 파는 것같이 크고 윤기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농약, 무비료 그야말로 순수한 무공해 자연산이다.
주식이나 부식뿐 아니라 기호품도 내 주변의 것으로 해결한다. 서울 살 때는 하루에 몇 잔씩 마시던 커피도 이미 잊은 지 오래고 병이나 캔 음료수도 언제 산 것이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에도 없다. 5, 6월에 말려 두었던 감잎 차는 구수한 맛에다 비타민C가 레몬의 20배라니 비타민 따로 먹을 필요 없고 6월에 담가두었던 매실 원액은 맛도 일품이지만 소화 안 될 때 조금 마시면 금방 트림이 나오며 뻥 뚫린다. 앵두 오디 따서 담가 둔 과일주는 그 색깔과 향이 기가 막히니 멀리서 다정한 이들 오면 마주하려고 아껴 두고 있다.
요사이는 작대기 하나 들고 나가 호박 덤불 사이사이 숨어있는 놈 찾아내어 무쳐 먹고 볶아 먹고 부침개 해 먹고…. 솜씨 좋은 우리 어머니 요리조리 요리해 상에 올리니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제철에 나는 푸성귀 과일은 실컷 먹는다는 것이 나의 먹거리주의다. 그렇다고 내가 이 모든 농사를 다 짓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상추 뜯어다 먹어…. 내가 바빠 뜯어줄 수는 없으니께 알아서 갖다 먹어.”
“아니, 고추 따다 먹으라니께. 어이 소쿠리 갖고 와.”
앞의 밭 김씨 아저씨, 옆의 밭 광희네, 뒷밭 이성구씨네, 인심 좋아 보이는 대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또 손 모자라 제때 따지 못하는 건 다 내 차지다.
서울로 볼일 보러 가는 길, 차창 밖 누렇게 변해가는 벼가 참 보기 좋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옆 자리 할머니의 혼잣말이 들린다.
“공장 참 많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들을 잠식해 들어오는 거대한 상자 같은 공장 건물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별별 종류가 다 있고 거대한 물류창고 앞에는 대형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실려와 풀어졌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저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 새삼 도시생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버리고 하던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것에 놀란다.
시골로 내려올 때 첫 번째 삶의 원칙으로 정한 것이 있다.
- 물자는 덜 쓰고 덜 버리기
- 마음은 많이 쓰고 많이 버리기
먹는 것이야 끊을 수 없으니 마련은 하되 되도록 노동하여 거둔 것으로 해결하려 노력한다. 의생활과 주생활에 쓰는 돈은 난방비나 전기료 등 기초적인 것 빼고는 거의 끊었다. 그러려면 몸을 움직여 노동을 해야 하고 편한 것 일부는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보면 또 다른 사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생활비는 3분의 1로 줄었고 만족감은 3배로 늘었다.
그래, 넉넉함과 행복감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물자와 편안함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