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호박과 사랑에 빠진 날

오늘 마당에서 단호박을 하나 따다가 쪄 먹었다.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단호박은 복잡한 요리 필요 없이 그냥 쪄 먹는 게 최고다. 지난 6월 9일 씨앗 뿌리기가 좀 늦어서 심을까 말까 망설이다 마당 구석에 몇 알 심어 놓았더니 일주일 되니 싹 나오고 이어 꽃 피고 열매 맺어 석 달 만에 이렇게 멋진 먹거리를 제공해주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친군가. 호박꽃이 밉다고 한 것은 순전히 모함이다. 꽃도 예쁘고 특히 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늘은 호박과 사랑에 빠진 날이다.

시골 살아 좋은 것은 먹거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은 소쿠리 하나만 있으면 된다. 봄에는 민들레, 씀바귀, 고들빼기… 먹을 수 있는 풀이 얼마든지 있으니 끼니때마다 나가 한 소쿠리 뜯어 무쳐 놓으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여름에는 상추 오이 고추 따다 고추장 푹 찍어 먹고, 감자 나올 때는 감자 캐서 졸여 먹고 삶아 먹고…. 서울 손님들 내려와도 뭐 맛난 것 대접할까 고민할 필요 없이 푸성귀 한 소쿠리에 고추장 한 종지 내놓으면 맛있다는 곳 다 찾아다니는 미식가들도 ‘최고다’ 하면서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한다. 여기에 디저트로 자연산 딸기 한 접시 곁들이면 호텔 디너파티가 울고 간다. 딸기는 씨를 뿌린 적도 없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뜰 한 귀퉁이에 자라기 시작하더니 제법 퍼져 여름이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매장에서 파는 것같이 크고 윤기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농약, 무비료 그야말로 순수한 무공해 자연산이다.

주식이나 부식뿐 아니라 기호품도 내 주변의 것으로 해결한다. 서울 살 때는 하루에 몇 잔씩 마시던 커피도 이미 잊은 지 오래고 병이나 캔 음료수도 언제 산 것이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에도 없다. 5, 6월에 말려 두었던 감잎 차는 구수한 맛에다 비타민C가 레몬의 20배라니 비타민 따로 먹을 필요 없고 6월에 담가두었던 매실 원액은 맛도 일품이지만 소화 안 될 때 조금 마시면 금방 트림이 나오며 뻥 뚫린다. 앵두 오디 따서 담가 둔 과일주는 그 색깔과 향이 기가 막히니 멀리서 다정한 이들 오면 마주하려고 아껴 두고 있다. 

요사이는 작대기 하나 들고 나가 호박 덤불 사이사이 숨어있는 놈 찾아내어 무쳐 먹고 볶아 먹고 부침개 해 먹고…. 솜씨 좋은 우리 어머니 요리조리 요리해 상에 올리니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제철에 나는 푸성귀 과일은 실컷 먹는다는 것이 나의 먹거리주의다. 그렇다고 내가 이 모든 농사를 다 짓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상추 뜯어다 먹어…. 내가 바빠 뜯어줄 수는 없으니께 알아서 갖다 먹어.”

“아니, 고추 따다 먹으라니께. 어이 소쿠리 갖고 와.”

앞의 밭 김씨 아저씨, 옆의 밭 광희네, 뒷밭 이성구씨네, 인심 좋아 보이는 대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또 손 모자라 제때 따지 못하는 건 다 내 차지다.

서울로 볼일 보러 가는 길, 차창 밖 누렇게 변해가는 벼가 참 보기 좋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옆 자리 할머니의 혼잣말이 들린다.

“공장 참 많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들을 잠식해 들어오는 거대한 상자 같은 공장 건물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별별 종류가 다 있고 거대한 물류창고 앞에는 대형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실려와 풀어졌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저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 새삼 도시생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버리고 하던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것에 놀란다.

시골로 내려올 때 첫 번째 삶의 원칙으로 정한 것이 있다.

- 물자는 덜 쓰고 덜 버리기

- 마음은 많이 쓰고 많이 버리기

먹는 것이야 끊을 수 없으니 마련은 하되 되도록 노동하여 거둔 것으로 해결하려 노력한다. 의생활과 주생활에 쓰는 돈은 난방비나 전기료 등 기초적인 것 빼고는 거의 끊었다. 그러려면 몸을 움직여 노동을 해야 하고 편한 것 일부는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보면 또 다른 사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생활비는 3분의 1로 줄었고 만족감은 3배로 늘었다.

그래, 넉넉함과 행복감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물자와 편안함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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