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편 (8)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63년 11월 22일, 미국 댈러스 공항에서 피투성이가 된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부여안고 ‘Oh, No~’라고 울부짖었던 재클린 케네디(1929~94) 여사는 200년 남짓 길지 않은 미국의 역사에서, 정치적인 업적과 전혀 관계없이 가장 사랑받은 퍼스트레이디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사상 처음으로 전국에 생중계된 장례식장에서 재클린의 침착하고 금욕적인 자세와 아버지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이 지나갈 때 아들 존의 거수경례는 모든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당시 텔레비전은 34세의 젊고 매력적인 미망인 재클린의 신비함을 창조해냈다.

재클린 케네디는 1929년 뉴욕의 명문가인 프랑스계 보뷔르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상류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워싱턴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로 활약했다. 기자 시절 그녀가 만난 여러 명의 취재원들 중 한 명이 바로 매사추세츠 출신의 젊은 하원의원 존 F 케네디였다. 53년 9월 12일 로드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에서 열린 그들의 결혼식은 교황의 축하 메시지를 비롯해 600여 명의 하객이 참석하는 성대한 예식이었다. 당시 존은 36세였고 재클린은 24세였다.

“결혼해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다 백악관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그들의 불행은 곧 끝날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외부와 단절된다. 그러면 남는 사람은 배우자밖에 없다.”

케네디 부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43) 대통령 다음으로 젊은 나이(44세)에 백악관에 입성했다. 정치가 존의 바람기가 그들 부부를 단절시켰다면, 대통령직은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새로운 친밀감도 존의 바람기를 가라앉히진 못했다. 재임 시절 존이 저지른 가장 위험한 불장난은 주디스 캠벨 엑스너와의 밀회였다. 마피아 두목의 애인이었던 그녀는 20여 차례나 백악관으로 존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임 이후 재클린은 국가의 상징인 백악관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백악관을 위한 미술위원회’를 발족시켜 낡고 초라한 이미지를 새롭게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62년 2월 14일 재클린은 자신이 새롭게 단장한 백악관을 전국에 공개했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텔레비전 특별방송에서 그녀는 진지하고 세련된 목소리로 자신의 역사지식을 동원하여 전 국민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미국 유산의 완벽한 후견인처럼 보였다.

언론은 재클린을 사랑했다. 줄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사진은 한 장도 실리지 않았다. 그녀가 백악관에 머물지 않았던 날의 횟수를 지적하는 기사도 없었다. 재클린은 정치에 끼어들지 않고 매우 지적으로 행동했다. 자신과 자녀들의 생활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등장하는 횟수를 계산하고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썼으며, 말을 아끼고, 자신에 대한 신비감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영화잡지의 표지에 엘리자베스 테일러보다 더 자주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8000통이 넘는 팬레터를 받았다.

취임 이후 첫 16개월 동안 행정부가 찍은 새로운 사진들 속에서 재클린은 거의 400여 개의 다른 차림으로, 대략 5만 달러로 추정되는 금액을 쓴 것으로 보였다. 대통령 월급의 절반이었다. 케네디 부부는 의상비 때문에 자주 다투곤 했지만 언론은 이 문제에 대해 역시 비교적 관대했다.

재클린은 여성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여성운동은 10여 년 뒤에나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미국 여성들에게 끼진 영향은 그 누구보다 강력했다. 그녀는 미국 여성들의 의상과 여가를 보내는 방법, 대화하는 방식, 운동과 독서 방향까지 변화시켰다. 그녀가 조촐하고 화기애애한 만찬을 좋아하자 미국 전역의 여자들은 그녀와 똑같이 둥근 식탁에서 아늑한 만찬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테 없는 납작한 모자와 민소매 드레스를 입자 당장 ‘재키 스타일’로 명명되어 미국 전역에 유행되었다. 그녀의 제2 외국어인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배우는 일 역시 유행이 되었다. 그녀가 수상스키를 타는 장면이 사진에 찍혀 공개되자 수상스키는 미국 중산층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되었다.

재클린 케네디는 남편 사망 후 5년 만인 68년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23세 연상인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오나시스는 약 2000만 달러 이상의 부동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75년 사망했다. 말년에 그녀는 출판업에 종사했다. 그녀는 94년 5월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는 2003년 미국 시에나 대학 여론조사에서 역사학자들로부터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 4위로 82년(8위)이나 93년(7위)보다 갈수록 인기도가 높아지고 있다. 케네디 부부는 아직도 미국인들에게 젊고 아름다운 대통령 부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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