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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연합(회장 신혜수, 이하 여성의전화)이 7월 2일 창립

15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83년 전화상담을

통해 아내 구타문제를 사회여론화하는데 물꼬를 튼 여성의전화는 올

해 초 ‘한국여성의전화연합’으로 명칭을 바꿔 이제는 19개 지부의

‘큰언니’로 성장했다. 많은 변화를 겪으며 여성인권운동단체로 뿌

리를 내리기까지 여성의전화가 걸어온 길 자체가 바로 여성인권운동

사. 이현숙 현 수석부회장이 97년 한해 동안 회지 '여성의 눈으로'에

연재한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추방사’가 이를 대변한다.

사실 여성의전화 태동은 크리스챤아카데미가 75년 유엔의 ‘세계여

성의 해’ 선포를 계기로 74년부터 여성사회교육을 실시해 새로운

한국여성운동을 예비한 데서 비롯됐다. 이때 교육을 받은 김희선 국

민회의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이계경 여성신문사 사장, 이현숙 평

화를만드는여성회 공동대표 등이 주축이 돼 80년대 들어 이뤄낸 성

과물이 바로 여성의전화다. 특히 당시 노동현장만을 운동의 현장으

로 삼은 단일화에서 벗어나 상담전화를 통해 폭넓게 대중과 연대기

반을 마련하자는 취지도 반영됐다.

여성폭력 상담전화란 아이디어는 당시 미국에서 한미건강정신센터

소장으로 일하다 귀국해 크리스챤아카데미 부원장을 맡은 이화수 박

사로부터 나왔다. 이 박사는 남편에게 매맞는 교포여성들을 많이 상

담해온 경험을 들어 한국에도 이런 여성들이 상당히 있을 것이란 의

견을 제시했다. 83년 6월 11일 개원식때 발표된 국내 아내구타 실태

조사 결과는 이 박사의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각 계층별

여성 7백8명 조사결과 42.2%인 2백99명이 남편에게 구타당한 경험

이 있음이 드러났다. 개원 한달간 접수된 5백41건의 상담전화중 절

반 이상이 매맞는 아내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여성의전화 역사상 남는 몇가지 사건들을 살펴보면, 우선 창립 이

후 첫 성폭력 대응사건이자 여성단체와의 연대로 기록되는 여대생

추행사건이 있다. 84년 9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저지시위에

참가했던 경희대 여학생 3명이 청량리경찰서로 연행돼 유치장 안에

서 알몸인 채로 전경들로부터 성적 추행과 희롱을 당한 사건이 발단

이 됐다. 시위저지의 수단으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성추행 사실들

이 속속 밝혀지면서 84년 11월 여대생추행사건 대책위원회가 구성돼

국회의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범국민적 서명운동을 벌여 군사정부의

폭력성을 맹공격했다.

86년 개설된 여성문제고발창구에 접수된 KBS TV 시청료징수원

박성혜씨 폭행사건은 직장내 여성폭행을 사회문제화해 시청료 거부

운동으로까지 확대시켜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례다. 박씨가 내부의

비리사실을 고발하자 소장을 비롯한 동료직원들이 폭언과 주먹질까

지 가한 사건이다. 여성의전화는 물론이요 각 여성단체들이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개하는 등 공동대응해 KBS로부터 사과를 받아냈고

문제의 소장은 보직을 박탈당하고 3개월 감봉처분을 받았으며, 박씨

는 정신적 피해보상과 더불어 근무조건이 더 나은 곳으로 전출되는

성과를 얻었다.

88년 9월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게 된 변월수씨 사건 역시 여성의전

화가 적극개입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새벽 1시경 귀가길 골목길에서

2명의 청년에게 끌려가 강간당할 찰나 키스하는 범인의 혀를 깨물어

위기를 모면한 변씨의 행동을 두고 여성의전화는 ‘강간에 대한 정

당방위도 죄인가?’란 여론을 일으켜 변씨가 무죄판결을 받는데 기

여했다.

이밖에도 파리바은행 박현옥씨 폭행사건, 김부남사건, 딸을 구타하는 사위를 살해한 이상희 할머니

사건 등 여성의전화는 이땅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여성인권 침해사

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로써 쌓아진

노하우와 현실적 접근법으로 90년대 초부터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운동을 적극 전개해 모두 통과되는 결실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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