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 오빠는 아주 건강했다. 요즘 우리 남매들의 걱정거리는 오빠가 아니라 남동생이었다. 오빠보다 아홉 살 아래인 남동생은 벌써 몇 달 전부터 중환자실과 입원실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평소 전화연락을 자주 않고 지내는 사이였던 우리는 요즘 몇 달 동안 남동생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자주 나누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 둘째 여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오빠가 위독하다는, 느닷없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슬픔 때문에 동생을 오빠로 잘못 말한 게 아닌가 싶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토록 건강해 보이던 몸에 암세포가 마구 자라 뼛속까지 퍼졌단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병원으로 달려가 만난 오빠는 오빠가 아니었다. 언제 만나도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던 오빠는 없었다. 왜 자신이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뼈를 갉아 먹는 고통으로 단 한순간도 잠을 못 이룬 채 지치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병상에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빠는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올케를 십년 전에 먼저 보냈기 때문에 오빠의 보호자는 딸이었다. 정확한 진단 결과가 나오면 그 즉시 오빠에게 알리기로 조카와 의견을 모았다. 그래야 남은 삶을 정리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빠에겐 그런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면회를 간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오빠는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이틀도 안 돼 갔다. 성미도 참 급하지. 살았을 땐 그리도 느긋하더니만.
앞으로 ‘재수 없으면’ 모두들 백 살씩들 살지 모르니까 단단히 채비를 하라고 노상 떠들고 다녔었는데 정작 내 주변 사람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뜨는 것 같다. 다른 부모님들은 여든 아흔까지 잘도 사시던데 우리 부모님은 왜 겨우 70대냐고 속상해한 게 얼마 전이었는데 오빠는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가 버렸다.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다른 가족은 늠름하게 일을 척척 처리해 나가는데 난 아무 것도 못한다. 공연히 눈물만 글썽이면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거치적거리기나 한다. 그게 영 민망스러웠던지 내 몸이 나를 감싸고돈다. 무슨 조화인지, 갑자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거다. 고만 슬퍼하고 네 몸이나 신경을 쓰라는 듯이. 아, 오빠의 죽음은 내 허리통증에 밀려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난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가장 편안한 자리를 확보하고 앉는 얌체 짓을 저지른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문상 가는 횟수가 잦아졌다. 젊었을 때는 문상 가는 일이 끔찍해서 아무 것도 안 먹고 얼른 나왔는데 나이가 들수록 편안해지고 상가에서 주는 밥도 맛있게 먹는다. 죽은 자를 앞에 놓고 산 자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배울 것 투성이다.
이제 오빠의 빈소에서 또 배운다. 타인을 위로하는 법에 대해서다. 문상객들은 오빠가 너무 황망하게 가버려서 속상해하는 내게 그런 죽음이 오히려 행복이라고 바꿔 말할 줄 안다. 고통스러운 투병기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잘 됐느냐는 거다.
인간의 최대 희망이 잠자다 죽는 것일진대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거긴 못 미쳤을망정 며칠 앓다 갔으니 그 정도면 복 받은 죽음이라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이미 인생 9단의 경지에 들어선 것처럼 넉넉해 보인다.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도처에 스승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