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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날씬하기만 하면 명함도 못 내민단다. S자 라인이어야 한단다. 그래야 한몸매 한다고 자랑할 수 있단다. 아이고, 조상님 덕분에 일찍 태어났길 망정이지, 내가 만약 지금 20~30대였다면 스트레스깨나 받았겠다.

정말이지, ‘몸’이 초미의 관심사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첫인사가 ‘몸’이다. 점잔을 떨어대던 옛 시대에도 몸에 관한 인사말이 없을 리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건강 상태’에 대한 안부였지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외모와 체형을 집어 언급하진 않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어른에 대한 인사는 기껏해야 ‘좋아 보이시네요’면 충분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새 ‘젊어 보이시네요’로 바뀌더니 요즘에는 처음 만나는 어른한테도 거리낌 없이 ‘정말 날씬하시네요’라는 게 인사다. 예전 같으면 나이 든 이가 좀체 살이 붙지 않을 경우 ‘어디 편찮은 데 있으세요?’라고 공연히 걱정스러워했을 텐데 지금은 딴판이다. 오히려 ‘무슨 운동하세요?’라며 취조하듯 캐묻는다.

민망스럽게도 나도 가끔은 날씬하다는 칭찬(?)을 들을 때가 더러 있다. 물론 나의 정체를 잘 모르는 여성들로부터. 글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날씬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짓이겠지만 내가 뭐 잘났다고 세속을 뛰어넘겠어? 인사치레건 거짓말이건 새파랗게 젊은 후배들로부터 날씬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엄청 업되는 걸 어떡하나. 하지만 양심이 모조리 증발한 건 아니다. 다음 순간 얼른 손사래를 치게 된다.

“아유, 내가 워낙 변장술이 뛰어나서 날씬하게 보이는 거지 실상은 아주 달라요.”

나로선 고해성산데 상대방은 겸손으로 받아들인다.

“그 연세에 그 정도시면 S자 라인인데요 뭐.”

“언감생심 S자는. O자도 못 돼요. 완전 거미 체형이라니까요.”

이토록 변명 아닌 변명을 열심히 해대는 걸 보면 나의 체형 콤플렉스도 참 어지간한 것 같다.

그렇다. 우리 사회를 열풍처럼 휩쓸고 있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해서 영 마뜩지 않아 하면서.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몸을 사랑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면서 동시에 나는 내 몸이 못마땅하다. 또 몸을 이렇게 방치한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한때는 나도 괜찮았다. 비록 S자는 아닐지라도 젓가락(당시엔 와리바시라는 일본말을 썼지) 같은 몸매를 뽐내고 다녔다. 미니스커트도 멋지게 어울렸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하나 낳고 둘 낳고 셋 낳으면서 나날이 두루뭉술해져갔다.

아이들은 이런 나를 펭귄이라 놀려댔고, 어떤 친구는 내게 ‘너, 인생 포기했니?’라며 따끔하게 꼬집었다. 그래도 난 끄떡없었다. 잘 먹고 건강하면 됐지 몸매는 무슨.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국 몸이 나빠졌다. 한참 동안 고생한 덕분에 적어도 겉으로는 다시 날씬해졌다. 옷만 잘 골라 입으면 꽤 그럴 듯한 몸매처럼 보인다. 하지만 눈속임이다. 실상은 비극적이다. 날씬하게 보이지만 S자와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그전처럼 O형에 가까운 펭귄체형을 유지했다면 안정감이나마 지켰을 텐데 그도 아니다. 의사들이 말할 때 가장 나쁜 체형, 바로 거미 체형이 지금의 나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참 이상한 건 예전에 비하면 열심히 운동을 하는 편인데도 몸매는 요지부동이라는 사실이다. 팔다리는 더욱 가늘어지는 반면 배는 점점 볼똑해진다. 나는 결국 모든 현상을 유전자에 갖다 붙인다. 아무렴, 피는 못 속인다니까.(슬프게도, 30대에 들어선 우리 아이들도 하나같이 내 말을 따라 한다)

엊그제 한 모임에서 이제 막 70 문턱을 넘은 선배를 만났다. 그날따라 자리에 모인 모든 참석자들이 선배의 S자 몸매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우리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선배에게 한턱을 강요했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던 선배는 기꺼이 날을 잡았다. 자, 우리 모두 S자로 변신하여 한턱 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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