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때부터 3년 동안 십리나 되는 학교를 걸어 다녔다. 숲을 지나 논, 논을 지나 간이 비행장 그리고 또다시 논둑길과 마을을 지나 학교가 있었다. 솔직히 학생치고 학교 가고 싶은 날이 어디 있을까만은 유달리 싫은 날이 있었으니 바로 비오는 날이었다. 이슬비야 낭만일 수도 있겠지만 며칠이고 계속 쏟아 붓는 장맛비는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궁색한 시골 살림에 변변한 비옷이 따로 있을 리 없었고 찢어진 종이우산은 언제나 쓰나마나였다. 게다가 작은 바람에도 뒤집어지기 일쑤이니 들고 다니기 차라리 짐스러웠다. 또 검정고무신은 왜 그리도 잘 벗겨지던지. 장마철에는 학교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잠에서 깨어나면 부엌에서는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날아왔다.

서울로 이사 와서 죽 살았던 곳은 한강변이었다. 마누라는 없어도 살지만 장화 없으면 못 산다는 상습 침수 동네였다. 다행히 우리는 산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 피해를 겪지는 않았지만 학교 다니는 길은 늘 시커먼 흙탕물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장화는 필수품이었다.

큰비가 오면 우리는 신이 나서 한강변으로 달려갔다. 시뻘건 강물에 소나 돼지가 떠내려 왔다. 때로는 집이 통째로 떠내려 오기도 했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던 그 시절 큰비 구경은 그럴 수 없이 스펙터클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장마가 시작되면 혹시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잠을 설쳤다. 아래 위 양쪽으로 축대가 허술한 데다 집도 너무 낡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간혹 축대 한쪽이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앉은 적이 있긴 했지만 부모님이 아파트로 이사갈 때까지 집은 아슬아슬하게 버텨냈다.

나는 결혼 이후 죽 아파트 생활을 해온 덕분에 비가 많이 와도 별 걱정을 않고 살았다. 그런데 방심은 금물이라고 20여 년 전 내가 살던 아파트 지하에 물이 꽉 들어차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1층에서 살았기 때문에 걱정을 꽤 했는데 옆 동네 아파트와는 달리 우리는 그걸로 그쳤다. 그래도 우리도 수재민이라고 구청에서 담요 한 장씩을 나눠 주었다. 색깔이 멋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조금 높은 층으로 옮긴 덕분이다. 그런데도 나는 갈수록 장마철이 싫어진다. 덜 마른 빨래에서 쉰 냄새가 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누가 나를 퍼붓는 빗속을 뚫고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니다. 아파트는 문만 꼭 닫고 있으면 눅눅하지도 않다.

장마철이 점점 싫어지는 까닭은 큰비만 오면 죽거나 다치거나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다. 그것도 착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만 골라서. 워낙 불공평한 게 세상살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진짜 천재라고 부를만한 재앙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치산치수를 잘못해서 강물이 범람하고 산이 무너지는 걸 천재라고 한다면 도대체 정부는 왜 있으며 세금은 어디다 쓰려고 걷어가는 걸까.

큰비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혼자 고향을 지키는 노인들이 많다고 한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할 수 없게 만들었는가.     

보송보송한 아파트에 앉아 TV가 전해 주는 참혹한 수해 현장을 ‘구경’하면서 나는 공연히 죄스러워진다. 큰비가 오는 것까지야 막을 수 없겠지만 죽는 사람만은 생기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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