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편 - 그녀가 만약 이혼을 택했다면 미국의 역사는 변했을 것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어느 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남편의 여행가방에서 편지 한 다발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남편의 비서인 루시 머서와 주고받은 연서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바로 자신의 코앞에서 바람을 피운 것이다.   

엘리너는 이혼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들에게는 5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당시 벌써 뉴욕주 상원의원이었던 프랭클린의 정치적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혼 대신 그녀가 꺼낸 카드는 독립선언이었다. 그녀는 착한 아내의 역할을 과감히 던졌고, 며느리와 아들 사이에서 경제권을 움켜쥐고 휘둘렀던 시어머니 사라의 간섭에서도 벗어났다.

루시 스캔들 3년 후인 1921년 두 사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프랭클린이 여름 뱃놀이 도중 입은 사고로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엘리너는 다시는 두 발로 걸을 수 없게 된 남편을 대신해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이 전략을 짜면 엘리너는 그 전략을 실현하는 눈과 귀와 다리가 되었다.

정치가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고, 두 사람은 강력한 정치적 동지로 다시 태어났다. 1933년에 루스벨트 부부는 드디어 백악관에 입성, 12년간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로 백악관에서 지내면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부흥시켰다. 만일 그녀가 그때 이혼을 선택했다면? 물론 미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은? 불행히도 엘리너는 프랭클린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담배 맛은 한결같지 않지만, 나의 입술에 와 닿는 당신의 혀 한구석에서 느끼는 맛은 한결같습니다.”

엘리너가 쓴 너무나도 애로틱한 이 편지의 주인공은 남편이 아니라 여기자 로데나 히콕이었다. 로데나는 엘리너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아예 언론사를 그만두고 백악관에서 엘리너와 같이 지냈다. 프랭클린은 그녀를 엘리너의 ‘여자 동거남’(she-man)으로 부르곤 했다. 엘리너 역시 루시 이후 프랭클린과 20여 년간 비공식적인 부부로 지낸 르핸느의 존재를 인정했다.

역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들이 남편의 바람기에 대했던 태도는 다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루스벨트 부부처럼 백악관에서 각기 다른 애인과 살면서, 또 공식적으로는 훌륭한 파트너십을 만들어낸 동반자는 드물었다. 대부분 퍼스트레이디가 남편의 바람기를 이해하는 쪽이었다. 특히 남성 중심 문화에 순응했던 존슨 대통령의 부인 레이디 버드는 바람둥이 남편의 애인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남편에게 자신을 가장 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는데, 그녀에게 엘리너의 이 같은 독립적인 삶의 방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엘리너의 바로 이 ‘당당한 다른 점’이 오늘날 그녀를 있게 한 ‘저력’이 아닐 수 없었다. 

강한 체력과 이상주의로 무장한 엘리너는 시대가 달랐다면 선교사가 될 수도 있었던 타고난 개혁가였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성공했다. ‘루스벨트 행정부’ ‘엘리너 행정부’로 불릴 정도로 독립적 위치에서 국정에 참여했던 엘리너는 대공황으로 인한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정치·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 독립적인 대중연설, 연설문 작성 등을 수행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했다.

그녀는 여성 고용에도 관심이 깊었다. 재임 12년 1개월 6일 동안 월요일 아침마다 여기자들만 초청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처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언론사들도 가끔 이 회견에서 금주법 해제 등 특종이 나오기 시작하자 앞을 다투어 여성 기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1936년부터는 퍼스트레이디로서는 처음으로 ‘나의 하루’(My Day)라는 칼럼을 매일 집필했다. 백악관에서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뉴딜과 관련된 사회문제, 세계 정세까지 두루 섭렵한 그녀의 칼럼은 135개 신문에 동시 연재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 전통문화 되찾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1940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3회 연임 대통령 후보 지명을 원하는 프랭클린을 대신해서 미국 최초로 연설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97년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개관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기념관에는 퍼스트레이디로서는 처음으로 엘리너관이 자리잡고 있다. 엘리너는 1945년 프랭클린이 사망한 이후 유엔 대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62년 78세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죽기 전 “내일을 기다리기 전에 내일을 오늘로 앞당겨야 한다”는 말을 남긴 엘리너는 사후 갤럽 조사에서 13년간 지속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여성으로 꼽혔으며, 미국에서도 가장 성공한 퍼스트레이디로 알려졌다.

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