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속에 빛난 천재성

파리의 부호 실크 상인의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난 소피 제르맹은 어린 시절 감정 표현 없이 홀로 지내는 아이였다. 의사와 정부 관료에게 시집간 언니와 동생과는 달리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집에서 지내면서 ‘한없는 열정과 헌신’으로 오직 수학만을 연구했다.

그녀가 13세 되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온통 세인의 화제를 점유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녀는 홀로 아버지의 서재에 파묻혀 아르키메데스의 전기를 읽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수학 연구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시러큐스를 침입한 로마 병사가 다가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1795년 파리공과대학이 설립되었지만 여성은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르맹은 재학생들과 사귀어 강의 노트를 빌렸다. 그녀는 수학자 라그랑주(J Lagrange, 1736~1813) 교수에게 재학생 르블랑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의문점이나 코멘트가 담긴 노트를 제출했다. 그 탁월한 학생이 누군지 추적하다가 교수는 그가 여성임을 알게 됐다. 그녀가 25세 되던 1801년에는 독일의 대수학자 가우스(C F Gauss)의 ‘정수론 연구’가 발간되었는데, 그녀도 이 책을 통하여 정수론을 연구하고 르블랑의 이름을 빌려 가우스와 지혜를 나누었다.

파리를 방문한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드니는 유리접시 위에 모래를 담고 마치 접시가 바이올린인양 활로 연주를 했다. 그러자 모래는 진동하며 다른 음이 연주됨에 따라 다르게 움직였다. 이 현상을 설명할 최고의 수학이론에 나폴레옹은 큰 상금을 걸었다. 공모자는 오직 제르맹밖에 없었다. 비록 수학적 결점이 존재하는 이론이었지만 접근법 자체는 정확했다.

탄성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최대곡률·최소곡률·평균곡률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여 이 현상을 설명했다. 그녀의 제안은 물리학의 기본 가정이 도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당했고, 심사위원회는 “여성에게 상을 줄 수 있느냐”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많은 수학자들이 그녀를 도왔고 결국 제르맹은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녀의 여성성은 언제나 그녀를 외국인처럼 변두리에, 전문과학문화권 밖에 맴돌게 했다. 제르맹은 과학아카데미의 회합에 참석할 수는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정회원이 되거나 학위를 받을 수는 없었다.

1829년 유방암을 선고받은 후에도 그녀는 수이론과 표면의 뒤틀림에 대한 연구를 완성했다. 1831년 6월 그녀의 사망 증명서에 적힌 그녀의 직업은 수학자나 과학자가 아닌 무직자였지만 사후 가우스의 노력에 의해 괴팅겐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아마도 제르맹 같은 천재만이 그런 고립된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지성과 열정은 후세 여성들에게 다만 수학하는 기쁨을 위해 수학에 도전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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