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충청남도 성환에서 서울로 올라온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러고 보니 꼭 반세기 전이었네.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농림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전근 때문이었다. 서울로 이사 간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어린 마음에도 드디어 나도 ‘대처’로 나가는구나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말이 서울이지 당시로선 한참 변두리였던 한강변 흑석동이었다. 명수대라는 근사한 별칭이 붙어 있던 흑석동은 마누라는 없어도 장화는 있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비만 오면 물이 잘 안 빠져서 질척질척한 동네였다. 동네 이름처럼 땅도 시커멨다. 그래서 산비탈 집을 얻으셨나? 우리 집은 버스 종점에서 좁은 길을 따라 한참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언덕배기에 자리잡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수도도 없어서 동네 공동 펌프장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빨래는 한강에서 했다. 어머니가 빨랫감을 담은 큰 양은 다라이(그땐 고무 다라이라는 것도 없었지, 아마?)를 머리에 이고 뒤뚱뒤뚱 걸으면 맏딸인 나는 빨래방망이를 들고 미적미적 따라 나섰다. 시골과 별 차이 없는 생활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면서 처음으로 ‘문안’ (사대문 안을 그렇게 불렀다) 구경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울내기 다마내기’들을 만났다. 문안의 이름 있다는 학교를 나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공주처럼 화사해 보였다. 오매, 기죽어. 그 이후 지금까지 난 ‘서울 사는 시골뜨기’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서울 인구가 100만 명이 될 즈음부터 ‘서울은 만원’이라는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 같은 시골뜨기까지 왜 따라 올라왔느냐고 욕하는 것 같아 ‘서울 사람’들한테 굉장히 송구스러웠다.

상경 50년을 맞은 지금도 내가 서울 사람이란 생각은 안 든다. 그럼 당신은 어디 사람이냐고? 그게 그렇다. 부모님 고향을 따라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기엔 뭐하고, 태어난 곳을 따라 수원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유년을 보낸 곳을 따라 충청도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그냥 한국 사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좀 달라졌다. 여전히 서울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가 ‘서울 시민’이란 생각은 확실하게 든다. 이렇게 서울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건 순전히 지방자치제 덕분이다. 예전에야 서울시장이 누가 되든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높으신 분이 정치적인 계산으로 임명하는 자리이니 다른 정치인들 하고 다를 게 없지 뭐. 서울시가 복마전이네 뭐네 하는 소리가 들려도 정치란 게 다 그렇지 뭐, 돈 있는 덴 구더기가 꼬이게 마련이지라며 빈정거리기나 했다.

하지만 서울시장을 뽑는 투표권이 내 손에 쥐어지면서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서울시장은 위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권력자가 아니라 1000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의 대리인일 뿐이며 그러므로 정말 잘 뽑아야 한다는, 이른바 건강한 시민의식이 눈을 뜬 것이다. 물론 서울의 미래가 곧 나의 미래라는 식으로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서울이 살기 좋은 곳이 되면 내 아이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나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그들이 꼭 서울에 살리라는 보장은 없지만서도)

시장이 마음만 먹으면 서울을 얼마든지 근사하게 바꿀 수 있다는 걸 믿게 되면서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제대로 된 마음과 힘을 가진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부쩍 커졌다. 사심 없고, 넉넉하고, 단단한 사람, 아울러 문화적 감수성을 갖춘 사람을.

그래서 요즘 각종 토론회에서 쏟아지는 시장 후보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내 마음에 드는 후보가 꼭 당선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점점 간절해진다. 이만하면 서울 시민 자격 충분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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