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엄마, 엄마가 내게 잘 해 준다고 했더니 친구가 ‘희한하다’ 그랬어요. 그래서 아빠도 잘해 준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것 참 희한하다’ 그러는 거예요. 이번에는 누나도 잘해 준다고 했더니 ‘정말 희한하다’ 했어요. 그런데 엄마, ‘희한하다’가 무슨 뜻이에요?”

늘 어휘가 부족해 황당하기가 여러 번, 그래도 그 덕에 많이 웃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는 희한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누나와 사이가 좋았었다. 그런데 이제 중3이 된 딸과 중1이 된 아들은 서로 눈만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는 정말 ‘희한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첫째인 딸은 제 나이에 맞는 교육을 시키려 안달을 부린 엄마 덕분에 교과서적인 모범생으로 컸다. 반면 뭐든지 처음이었던 딸에 연연하느라 상대적으로 관심 밖에 있던 아들은 누나와 전혀 다른 ‘반교과서적’인 아이로 자라 거리낌 없이 엉뚱한 일을 했다. 난 첫째와 전혀 다른 아들의 행동을 오히려 신기해하고 너그럽게만 생각하다 결국 교육 시기를 놓쳐 한글도 못 떼고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지금까지도 어휘가 모자란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 깨달은 생존 방식을 통해 개성과 창의성이 강하고 사교성이 좋은 아들은 주변의 관심과 사랑을 더 받았는데, 이 점이 늘 딸과 아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딸은 누가 봐도 심할 정도로 동생을 미워했다. 사춘기라서 그러겠거니 했지만 문제는 아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내 생각 이상으로 컸다는 것이다. 하루는 아들이 자기는 누나와 잘 지내고 싶은데 누나가 자기를 너무 미워해서 같이 지낼 수가 없다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면서 “누나와 나 사이에는 톱니바퀴에 낀 돌 같은 것이 있어요. 아무리 돌리려 해도 안 돌려져요. 엄마가 그 돌 좀 빼 주세요”라고 했다.

‘아니, 이런 멋진 표현을!’ 그러나 아들의 표현력에 감탄하고 있기에는 사태는 심각해 보였다. 마치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이 엄마가 그 돌을 빼 줄게!” 하며 딸에게로 갔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잔소리가 되지 않게 나와 동생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평소보다 무게 있는 어투와 표정으로 설명하는 것 뿐이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딸은 더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딸도 사실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반성하는 기색에 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엄마가 바퀴의 돌을 뺐단다” 나도 왠지 그 표현이 만족스러웠다.

이 약발(?) 역시 며칠 못 가고 다시 예전처럼 미움과 갈등이 시작되었지만 아들은 엄마가 자기 편이 되어 준 것에서 큰 힘을 얻었는지 덜 힘들어했고 딸도 조심하는 눈치였다.

며칠 전 아들이 맹장 수술로 오래 입원을 했다. 입원기간 내내 혼자 집에 있어야 했던 딸은 동생의 빈 자리를 크게 느꼈을 것이다. 병문안을 와서 세 번이나 고쳐 썼다며 내민 긴 편지에는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이 묻어 있었다.

이 분위기 역시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툴 때 그 사이에 낀 돌을 엄마가 빼 줄 수는 없다. 다만 엄마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아이들 스스로 경험하며 그 돌을 빼내는 것은 아닐까. 말로는 “엄마가 빼 줄게” 했지만 이것은 다만 관심이었을 뿐, 아무리 엄마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랑과 관심을 주고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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