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어머니를 잃었다. 이 신록의 계절에. 친구는 ‘쪼끔만 더 잘해 드릴 걸. 짜증내지 말고 쪼끔만 더 잘해 드릴 걸’하며 울었다. 내가 알기론 병상의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친구였는데 더 잘해 드리지 못했다고 못내 가슴아파했다. 한참 동안 친구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친구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그 순간 내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했던 딸 노릇에 대해 평소 애써 눌러 두었던 부끄러움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며칠 전 들은 이야기에 ‘1무 2유’라는 유머가 있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 없어야 할 것 한 가지와 있어야 할 것 두 가지는 무엇일까? 1무는 남편, 2유는 돈과 딸이란다. 유머는 단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딸이 더 좋아’라는 말이 아들 못 낳은 여성에 대한 위로의 차원을 벗어난 지 오래 됐고 나 또한 그 말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단서가 붙는다. 단, 나 같은 딸이라면 해당사항 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오십 여 년을 난 한 번도 딸 같은 딸 노릇을 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모녀가 그러듯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티격태격해 본 적도 없고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오사바사하게 나눠 본 적도 없다.

딸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보면 어머니를 더 이해하고 사랑한다는데 난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사는 데 골몰하느라고 어머니가 점점 약해져간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명절이나 생신 그리고 1년에 한 번 있는 어버이날에나 겨우 안부를 챙기는 주제면서, 아, 그런 날이 왜 그리 빨리 돌아오느냐고 짜증스러워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일이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왔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가족 사랑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게 아니라 주머니 사정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같은 달에 넣었느냐면서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 스승의 날이야 모른 척하면 그만이지만, 그리고 아이들에게 드는 돈이야 아깝지 않지만, 양쪽 부모님께 드릴 선물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지끈지끈했다. 해마다 맞는 어버이날이면서도 그 때마다 고민스러웠고 부담스러웠다. 이번엔 무엇을, 얼마어치를 드려야 하지? 얼마는 너무 적은 것 같고 얼마는 너무 많은 것 같고, 계산속이 어지러웠다. 시어머니께 이만큼 해야 하니 친정부모님께는 저만큼 해야지, 딸이니까 이해하실 거야, 아니 아니, 다 같은 자식인데 똑같이 해야지…. 한참 머리를 굴리다 보면 자식의 이런 고충도 모른 채 부모님들은 그 날만 기다리고 계신 것 같아 미운 마음까지 들었다.

참 웃기는 얘기지만, 그럴듯하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꾸자꾸 부담스러워져 드디어는 부모님 자체를 부담으로 여기는 불효로 이어지고 만 거다.

양쪽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와 생각하니 그토록 효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이 정말 어리석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효는 물량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받고 싶은 건 그냥 탈없이 살고 있는 모습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지금 내가 그렇듯.

갈수록 효도는 돈으로 교환된다. 어버이날 선물을 소개하는 백화점 전단지가 화려하다. 주눅 든 자식들은 지레 효도를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마음마저 접는다면 그야말로 불효다. 그저 쪼끔만 더 잘해 드리면 그것이 바로 효다.

5월, 그 낭랑했던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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