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면 모자람만 못해, 일일이 챙겨주면 역효과, 관심은 갖되 간섭 말아야

나의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진학 지도에 바쁜 고3 담임을 단골로 맡아 하셨고 그 이후에는 악명 높은 학생주임이 되시는 바람에 언제나 바쁘셨다. 모든 학교 일정은 언제나 거의 같은 날에 치러지기 마련이어서 난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외숙모 손을 잡고 갔고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달랑 혼자 갔다. 옛날엔 지금처럼 아이들 입학식, 졸업식에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동원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안 오시는 아이들은 참 드문 편이어서 언제나 마음이 허전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누군가 학교로 우산을 가져올 리 만무한 나는 학교 건물 현관 어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아이들 틈을 비집고 젤 먼저 빗속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학교 준비물에서부터 방학숙제, 각종 시험 등의 학교생활에 엄마가 개입했던 적이 있었던가? 엄마는 그저 나보다 먼저 출근하고 저녁 직전에 돌아와서 밥을 같이 먹고 소파에서 끄덕끄덕 조는 우리 집 하숙생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난 그런 우리 집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싫어졌다. 사춘기 때는 그런 자유와 방임이 나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듯도 했지만 결혼을 하려고 보니 새삼 어렸을 때의 상처가 생각이 나서 엄마와 같은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반항이었다.

우리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평생 살림만 하면서 늙는 엄마를 보고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하는 것처럼 나 또한 엄마의 인생과 달리 ‘집에 있는’ 엄마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아이들에게 우산도 가져다주고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 학교 청소에서부터 시험 감독까지 학교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준비물도 챙겨보고 숙제도 도와주고 심지어는 아이들 스케줄을 본인보다 더 훤히 꿰고 있다가 틈날 때마다 주의를 환기시켜주기까지 했다.

가방이 너무 무거우면 키 안 자랄까봐 안쓰럽고 학원 가기 힘들다면 자가용 대령해서 데려다주고 말이다. 온통 아이 인생과 엄마 인생이 범벅이 되어 돌아가다 보니 ‘나’는 어디로 가고 아이들만 버르장머리 없이 엄마 속에 군림해 있다. 정신이 번쩍 난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이 내가 기대하는 만큼 행복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엄마가 집에 있어 좋다고는 하지만 순전히 엄마를 위로하는 외교성 발언이다. 그 아이들은 내가 가진 상처는 없지만 대신 자기 인생을 온전히 혼자서 누리는 기쁨을 상실한 처지다. 그래서 엄마에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큰소리만 탕탕 친다. 자기 일이 잘못되어도 엄마 탓을 하고 신경질을 낸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아이들에게 울타리를 크게 치고 관심으로 바라보긴 하되 일일이 간섭하지 말라”던 엄마의 조언이 새삼스럽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자라기 위해서는 저 나름의 빈 공간이 필요한 것을. 그걸 채워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지난 세월이 안타까워진다. 좋은 엄마가 되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지개를 좇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안간힘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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