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물·생명과학 분야

“도대체 남자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올해도 여자 연구원을 뽑을 수밖에!”

LG생명과학기술연구원의 김애리 의약개발그룹장은 ‘여성, 과학을 만나다’란 책을 통해 신입 연구원 면접 과정에서 여성 연구원이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과학기술 분야 중 생물학 및 생명과학의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앞질렀을 뿐만 아니라 여성 과학자들이 세계가 주목할 만한 논문들을 잇달아 발표하는 등 이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선 생물 및 생명과학이 섬세한 여성의 성격과 잘 맞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여성 과학자 간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성, 활발한 정보 교류를 하고 있고 각종 시상식을 통해 역할모델과 신진 여성 과학자 발굴에 노력해 왔다.

박현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생명과학 분야는 정교하고 복잡하며 많은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학문”이라며 “세밀하고 포용력이 강한 여성에게 적합한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부의 2005년 과학기술연구개발활동조사에 따르면 여성 연구원 2만5000여 명 가운데 생물학 전공 연구원 수는 1400여 명으로 남성 연구원 3000여 명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분야 여성 대졸자가 남성 대졸자 수를 앞지르고 있어 고급 인력 배출에 희망적이다. 교육부의 지난해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생명과학과 생물학 전공자의 대학 졸업자 수는 여성이 각각 2061명, 1739명으로 남학생(생명과학 1999명, 생물학 1237명)을 추월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여학생이 992명으로 이 역시 남학생(778명)보다 많았으며, 취업률(남 1447명, 여 1502명)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 분야의 대표적 여성단체로 2001년 창립한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WBP)은 893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회원 대부분이 대학(655명 73%)에 재직하고 있다. 다음으로 정부출연연구소 105명(12%), 민간연구소 37명(4%), 기업체 21명(2%), 정부기관 12명(1%) 순이다.

WBP는 여성 연구자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 참여했으며, 우수 여성 과학자를 격려하고 신진 여성 과학자를 발굴하기 위한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 진흥상 및 펠로십’ ‘새별여성과학자상’을 마련, 매년 시상하고 있다.

과학기술부 첫 여성 기관장으로 유명한 나도선 이사장은 WBP의 창립위원장과 초대 회장을, 그리고 2003년 창립된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도 역임해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뒤를 이어 유영숙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생체대사연구센터장이 현 WBP회장을 맡아 여성 생명과학계를 이끌고 있다.

유향숙 ‘21세기 프런티어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단장은 우리나라 게놈(genom) 연구의 총책임자이며 과학기술 우수논문상·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상 등을 수상했다. 유명희 박사 역시 의약용 유용 단백질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21세기 프런티어 프로테오믹스이용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으며, 유네스코가 제정한 제1회 로레알상을 수상했다.

2004년 서울대 여성 첫 주요 보직에 임명된 노정혜 연구처장은 효모와 곰팡이, 유전자 발현·조절 등이 주 연구 분야이다. 국내외에 98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과학논문인용색인(SCI) 횟수만도 44건에 달해 질 높은 연구 성과를 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생명공학 벤처업체 리젠을 창업한 배은희 박사는 장기손상 및 노인성 치매 등의 해결에 노력하고 있고, 피부이식제 개발로 각광받고 있다.

이와 함께 김빛내리·백성희 서울대 교수 등 차세대들의 향후 연구성과도 기대된다. 김 교수는 마이크로 RNA 생성에 관여하는 효소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으며, 백 교수는 암 전이를 막는 유전자의 기능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유영숙 WBP 회장은 “최근 여성 과학자들이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지만 비정규직 문제, 고위직 진출, 출산·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며 “무엇보다 정부의 강력한 육아지원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생물·생명과학 분야 선구자
근현대 생물학은 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신설되면서 시작됐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엔 농수산학·의학 관련 전문학교에 관계 교과목으로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 생물학 분야 첫 개척자인 김삼순 박사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거쳐 1943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66년 규슈대학에서 농학박사를 취득했다. 응용균학을 전공한 그는 72년 한국균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91년 성균관대 생물학과에서 정년퇴임한 이현순 박사 역시 66년 클로렐라의 광합성에 대한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국내 유일의 광합성 세균 연구자였다.

생물학 분야가 유전학, 세포생물학, 미생물학, 분자생물학 등으로 세분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다. 77년 서울대에 자연과학종합연구소가 설치된 후 타 대학으로 퍼져나갔으며, 59년 한국미생물학회 창립에 이어 한국곤충학회(70년), 한국생태학회(76년), 한국유전학회(78년) 등이 속속 창립됐다.

특히 김지영 교수가 85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유전공학센터 개설에 참여하고, 이후 나도선 이사장, 유명희 박사 등이 합류하면서 ‘유전공학 여성 트리오’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여성과학자 칼럼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필자는 한국에서 대학 4년을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그 곳에서 1년 정도의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한국에서 직장을 잡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는 물리로서 여성들이 흔히 기피하는 학문이고, 이는 현재에도 가히 다르지 않다. 따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내 주위에는 대부분이 남성들이었고, 항상 소수로서 살아온 듯하다. 이는 경력이 높아질수록 더 두드러지는 듯하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도 대학이라는 사회가 그렇듯 여교수 수가 전체적으로 15%도 못 미치는 가운데, 본인 소속 단과대학은 그나마 5% 정도에 그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소수인으로 24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 자신만 잘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남성들과 대등해지기 위해 나만 더 많이 노력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성공하고 못 하고는 개인적인 문제이지 사회나 다른 시스템의 탓으로 돌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작년부터 학회에 얽혀 여성위원회 일을 보게 됐다. 여성 물리학자 관계 국제학회도 참석하고, 나름대로 한국 내에서 아시아 지역 여성 물리학자들의 워크숍도 주관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같이 모여 서로의 상황에 대해 의논하고 갖가지 해결 사례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의식도 제기되고, 공동체 의식도 갖게 됐다. 나 자신이 갖고 있던 문제가 나 하나가 아닌 다른 대부분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그 대책 역시 개인이 아니라 좀 더 범사회적이고 체계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개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들이 많다. 소위 여성 인력의 네트워킹 문제만 해도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그런 준비를 누가 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아직 우리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미미하다 하겠다. 우리가 찾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에게 나서서 돌려주지 않는다.

최근에는 정부에서도 과학 기술계 여성인력의 비율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각종 기금이나 연구비를 통해 여성들의 경력 개발이나 경쟁력 강화에 지원을 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지원을 받을 여성들의 인식이 여전히 2년 전 나의 수준(개인적인 책임감)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최근에 각종 고시에서 여성의 비율이 50%가 넘고, 중·고등학교에서도 상위 그룹의 다수를 여학생들이 차지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여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나올 즈음 여전히 우리 사회가 현재의 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이들이 사회에 대해 느끼는 것은 불공정함밖에 없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이들이 앞으로 더 나아갈 발판이라도 마련해 주기 위해 우리 기성세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인식을 바꾸고 이를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을까? 여성들이여, 좀 더 적극적이 되자!

[윤진희 /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