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를 다녀왔다. 비까지 뿌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였지만 얼마 안 되는 자손들이 함께 가려면 일요일밖에 없어 그냥 강행했다. 꽃을 꽂고 간단한 제수를 차려 놓고 절을 하곤 금방 내려왔다. 잠깐이었는데도 모두들 몸이 얼었다. 뜨뜻한 온돌방에서 칼국수를 사먹고 나니 그제야 몸이 풀렸다. 성묘의 풍속도도 이렇게 급변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새삼 기분이 착잡해졌다.

제사와 성묘. 결혼하고 처음 해본 일들이다. 젊었을 때 당신의 부모님을 떠나 남쪽에서 둥지를 튼 부모님 덕분에 나는 제사와 성묘는 구경도 못하고 살았었다. 시아버지 산소는 망우리에 있었다. 지금이야 도심을 갓 벗어난 위치이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성묫길이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차편이 영 마땅치 않았었다. 음식에 꽃에 돗자리까지 싸다 보면 짐의 부피와 무게가 상당했다. 한식과 추석, 1년에 두 번 하는 성묘는 제사와 더불어 시집의 최대 행사였다.

산소는 거의 산꼭대기에 있었다. 성묘 갈 때마다 미리 관리인에게 돈을 보내 벌초를 시켰지만 그 외에도 일이 많았다. 잔디나 나무 관리에 소소하게 드는 비용 이외에 가끔씩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했다.

산소의 모양만으로도 한 집안의 쇠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두 해만 손을 안 보면 산소는 놀라울 정도로 황폐화됐다. 시아버지 바로 옆 산소는 한동안 정성스레 가꾸더니 어느 해에 가 보니 봉분 위에 잡초가 봉두난발처럼 자라났다. 이듬해에는 비석까지 뽑혀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가세가 급격히 몰락했거나 이민을 갔거나 한 것 같았다. 그런 산소가 점점 늘어나면서 나는 일찌감치 화장을 결심했다.

전 국토의 묘지화를 걱정한다는 거국적인 이유보다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돌볼 이 없는 산소가 될 확률이 높은 이 시대에 매장을 고집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시어머니는 진작부터 당신 사후에 화장을 해달라고 당부하셨지만 워낙 보수적인 큰형님 내외는 들은 척도 안 했었다. 그리고 시아버지 산소에 합장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나는 왜 본인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불효막심한 며느리라는 핀잔만 들었다.

하지만 인생은 항상 뒤통수를 치는 법이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우셨던 시어머니보다 먼저 큰동서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일이 벌어졌다. 큰아주버님은 별로 머뭇거리지 않고 아내를 화장하여 납골당에 모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역시 화장을 해드렸고 결국 가족납골묘를 마련해 웃대 조상들과 시아버지까지 다 함께 모셨다. 순식간에 묘지문화에 개혁의 바람이 분 것이다.

가족납골묘에는 나도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 뭐 예약했다고 해서 반드시 입장하라는 법은 없지만 아무튼 그 예약은 백퍼센트 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난 납골묘 자체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다. 난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가족회의 때 아이들이 딴죽을 걸었다. 왜 내 생각만 하느냐고. 자기들이 내 생각이 날 때 찾아가야 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 말을 들으니 약간은 센치해지면서 그래, 살았을 때 해 준 게 없는데 죽을 때까지 내 주장만 한다면 좀 매정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예약유효 상황이다. 그러니 최근 몇 년 동안의 성묘는 조상에 대한 인사라기보다 결국 나의 미래의 집을 탐방하는 길인 셈이다. 이렇게 갈 곳이 뻔히 정해져 있는 줄 알면서도 왜 하루하루가 번뇌로 뒤숭숭한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백할 게 있다. 언제나처럼 난 이번 성묫길도 일단 시집 우선이었다. 별로 멀지 않은 납골당에 계신 친정 부모님은 또 나중으로 미뤘다. 한식엔 오빠가 어련히 가겠지 하고 은근슬쩍 넘어가 버렸다. 이 못 말리는 출가외인주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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