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병…치유 위해선 ‘여성의 힘’ 필요

최근 2∼3년간 여성의 정치 세력화 방안을 논의하는 토론회에 가면 자주 만나게 되는 남성 정치학자가 있다. 김형준(49)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여성 정치인 수를 늘리기 위해 지역구 여성 공천 30% 의무화, 여성 전용 선거구제, 여성 친화적 경선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선 그 어떤 제도도 도입되지 못할 전망이다. 대다수 남성 국회의원들이 ‘역차별’을 이유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 의원들 역시 단합된 모습으로 일관되게 한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김 교수는 “여성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30% 여성 공천 의무화를 법 제도로 만들지 못한 것은  ‘정치적 직무유기’와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여성 국회의원 대다수가 여성·시민운동의 결실인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 여성 전략공천 등에 힘입어 배지를 단 것을 감안하면 그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 교수를 3월 24일 여의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에서 만났다.

-여성 의원들 중에도 ‘지역구 여성 30% 여성할당’을 제도로 명시할 경우 ‘여성 인력풀이 적어 현실화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여성 정치인 수가 늘어나려면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여성인력 풀이 없다고 하는데 인력 풀은 단계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전략적으로 여성공천을 획기적으로 실시한 것처럼 당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여성 공천을 적극적으로 단행해야만 여성 의원 수가 늘 수 있다. 그래야 그 다음 선거에서 출마할 여성들이 많아진다. 현재 여성들의 진출이 대단히 미약한 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 ‘경쟁을 동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 지배 구조를 고착화하기 위한 남성 편의주의적 사고다.”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정치학자로서 우리 사회의 발전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미국 사회의 주요 가치는 기회균등 보장과 차별금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 우리 사회는 남녀, 지역, 학력 차별이 혼재해 있다.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와 성숙한 여성운동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끄는 견인차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로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 여성이 차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한국여성학회에 가입한 이유와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 주제가 있다면.

“여성의 힘은 포용성이다. 배타성이 강한 한국 사회를 치유하려면 여성의 힘이 필요하다. 학문적인 접근을 하고 싶어 (여성학회에) 가입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참여에 대한 여성들의 의식, 태도, 신념의 변화를 연구하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어떤 수준에 놓여 있는지 비교해보고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발견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다. 규범적 시각에서 벗어나 분석적으로 접근할 계획이다.”

-차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랐다. 차별을 경험해본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학벌 카르텔이 매우 강한 사회란 점에서 차별을 느끼긴 했지만 결국 실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좀 달랐다. 대학에서 교수를 뽑을 때 능력을 갖췄음에도 여성이기에 배제되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렇기에 각 분야에서 여성 할당제 의무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금, 여성운동은 향후 어떤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여성 비정규직, 저출산, 초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은 여성이다. 근원적 문제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지표로 만들어 해결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싶다.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는 남성 중심적 문화형식을 변화시키려면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참회가 필요하다. 남성과 함께 하는 여성운동이 돼야 한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서 여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들을 분석하고 10년 앞을 내다보며 정교한 ‘여성발전 로드맵’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여성주의, 양성평등 교육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양성평등 교육은 결국 민주주의 교육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예방주사다. 주사를 맞은 사람은 권위주의에 내성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양성평등 교육을 확실하게 한다면 우리 사회 민주주의는 굳건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주요경력 및 여성관련 논문

[주요경력]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정치학 박사(의회 및 선거 전공)/ 현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현 경실련 정치개혁위원회 위원/ 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부소장/ 현 한국정치학회 이사/ 현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현 한국여성학회 회원

[논문] 여성 국회의원의 의정활동과 여성정책 발전(2005)/ 한국의 여성정책:민주화이후 여성정치의식과 참여의 변화(2004)/ 17대 총선과 여성후보 투표:이념, 인식, 인지, 관심의 정치 심리적 요인을 중심으로(2004)/ 17대 국회 국정감사 평가:의원 국감활동 평가 여론조사를 중심으로(2004)/지방선거와 여성 참여 확대 방안 고찰(2004)

김형준 교수의 지극한 딸 사랑

“딸 많은 처가 요리하는 장인을 보며 남성 중심 사고 서서히 바뀌었죠”

김형준 교수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매우 강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20대 때 아내 나혜영 명지전문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를 만나면서 그의 사고는 대전환을 맞았다.

김 교수는 “안사람은 딸만 다섯인 집안에서 자유롭게 성장한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며 “집에 놀러가면 장인이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자식들의 도시락을 손수 싸주는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바뀌었다”고 털어놓았다. 여성학 관련 책 가운데 김 교수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은 베티 프리단이 쓴 ‘여성의 신비’였다. 프리단의 도전정신과 과학정신에 매료돼 프리단의 모교인 미국의 스미스 칼리지로 딸을 유학보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8년간의 유학생활 중 3년간 부인이 아이를 돌봤다. 그 이후는 김 교수가 아이를 돌보며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아내를 뒷바라지했다. 스무 살 대학생으로 성장한 딸은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고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을 데리러 왔던 아빠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딸에게 김 교수가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주변의 허황된 요구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사회에 봉사하며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 것, 둘째 당당함, 실력, 철학을 갖고 살 것.

딸에게 당당한 아빠로 기억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김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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