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본 전 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코

도이 다카코는 36년간의 정치인생에 있어서 ‘호헌(護憲) 의원’으로 불리며 진보세력의 대모로, 여성 정치세력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주력해온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다.

도이 다카코는 1928년 11월 30일 효고현(兵庫縣) 고베시(神戶市)에서 2남 3녀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45년 교토여자전문학교(현재의 교토여자대학) 외국어과에 입학했으나, 대학 3학년 때 도시샤대학 교수이며 헌법학자인 다바타 시노부의 ‘평화주의와 헌법9조’라는 강연을 듣게 된 것을 계기로 49년 도시샤대학 법학부 3학년에 편입학, 같은 대학원에 진학했다.

56년 대학원 졸업 후 헌법학자의 길을 걷던 중 68년 사회당으로부터 입후보 제의를 받고 헌법학자로서 “헌법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는 정치를 위해” 입후보 제의를 수락하고 69년 효고 2구에서 일본 사회당에서 입후보해 당선했다.

이후 12회 연속 당선됐으나(2003년 선거의 경우 지역구에서 자민당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고 비례대표로 부활당선), 2005년 9월 11일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 5명 중 5위로 이름을 올리고 지지를 호소했지만 사회당의 참패로 낙선함으로써 정계를 은퇴했다.

일본 헌정사상 최초로 여성 당수(사회당 86∼91), 여성 중의원 의장(93∼96)을 역임했고, 사회당이 사민당으로 개명한 뒤 다시 당수(96∼2002)를 맡았다. 사회당 당수 시절에는 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정치사상 최초로 여소야대를 실현하여 “산이 움직였다(山が動いた)”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도이의 정치행적은 호헌평화주의와 여성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군사적 침략행위”라면서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을 반대하고 이라크 전쟁에 지지를 표명한 고이즈미 내각의 퇴진을 주장했다.

도이는 여성의 의회 진출과 여성정책의 확대에 힘을 쏟았다. 89년 참의원 선거에서 당시 도이 위원장이 이끄는 사회당 소속 여성 후보 11명이 당선됨으로써 원조 ‘마돈나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이에 의한 대표적인 여성차별 철폐의 결과물을 꼽는다면 단연 국적법 개정이다. 도이는 메이지시대 이래 ‘출생 시 아버지가 일본국민’인 경우에만 자녀가 일본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한 국적법이 헌법 제1조 ‘성별에 의해 차별 받지 않는다’는 규정에 위반된다는 논리로 맞서 국적법의 위헌성을 호소하여 85년에 국적법 개정을 이루어냈다.

96년 다시 당수를 맡은 도이는 사민당의 시민정당으로의 모색을 꾀하는 한편, 여성파워를 전면에 내세워 당의 이미지를 변화시키고자 했으나, 자민당과의 연정에 따른 정체성 상실은 도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또한 2002년 이후 피랍 일본인문제가 전면에 대두되면서 사회당 시절부터의 친북노선은 일본인들로부터 정면으로 공격받게 되었다.

사민당이 몰락하는 와중에서도 그는 끝까지 평화헌법 수호를 외치며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에 맞섰으나 결국 도이는 80년대부터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계속 거론되어 온 영광을 뒤로하고, 그가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평화헌법’이 가장 위기에 처한 시점에서 정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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