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불길’ 잡혔지만 이민 2세 좌절·분노 여전

파리 북역에서 전철을 타고 생드니역 앞 광장에 내렸다. 대대로 공산당이 집권한 파리시 북쪽 교외의 유색인종 밀집 지역이다. 오후 4시였다. 한 흑인 여성이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에서 군 옥수수를 하나 꺼내 젊은 아랍 청년에게 건네주고 몇 푼의 동전을 받는다. 아직 젊어 보이는 그 여성의 옆에는 서너 살 난 남자 아이가 서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초록색, 갈색 등의 천으로 만든 아프리카 전통의상을 입은 수많은 흑인 여성이 모두 옥수수를 팔기 위해 역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고, 실업자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다. 이곳이 과연 프랑스 땅인가 싶었다. 다시 지하철 6번 선을 타고 파시역에서 내렸다. 파리의 부유층이 사는 16구의 중심지이다. 옷을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이 기분 좋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거리를 지나다닌다. 개를 데리고 여유 있게 산보하는 중년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한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가 보니까 경찰이 흑인 청년 두 사람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흑인 청년들이 응하지 않고 있어서 경찰과 청년들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은 무조건 신분증을 내보이라고 요구하는데 흑인 청년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거리를 걸어가는데 왜 신분증을 요구하느냐”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신분증을 요구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내내 프랑스 TV의 화면을 열기로 가득 차게 했던 장면들 뒤에 있는 두 개의 실상이다. 이제 TV 화면에는 더 이상 불타는 자동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난 유색인종들의 분노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내뱉은 분노의 뿌리는 깊다. 파리 남동쪽 교외인 그리니에 사는 동포 한민우(53)씨의 증언에 따르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리니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경찰들도 스무 명 정도가 무리를 지어서 순찰을 다녔는데 요즈음은 그것도 위험해서 아예 헬리콥터로 순찰을 돈다고 한다. 밤이면 헬리콥터의 진동소리로 마치 전쟁터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프랑스 역사학계에는 식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62년 알제리 해방 전쟁의 종식으로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문제를 일단락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사람들의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파리의 북쪽과 동쪽 교외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교외 전철의 노선이 점점 더 멀리까지 확장되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모 세대는 은퇴를 시작했고 그들의 자녀들이 일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경제는 더 이상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실업률이 10%를 오르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에게는 직업학교 졸업장도, 대학 졸업장도 큰 소용이 없었다. 교외 아파트 단지를 가보면 10대 초반의 아이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학교에서 낙제를 거듭했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마약 밀매를 하거나 좀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감옥의 70%를 유색인종이 채우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출신 여성 엔지니어인 라디자(33)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4년, 프랑스 공화국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공립학교에 아랍 여학생들이 두건을 쓰고 등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에 반대 운동을 벌였던 그녀는 아직도 고집스럽게 두건을 쓰고 다닌다. 그녀는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러 갈 때마다 두건을 써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도덕적 혼란을 겪는다. 두건 착용이 고용인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두건 착용 문제에 대해서는 아랍 공동체 내부에서 내분이 있었다. 두건을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집단과 그것을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청년들의 항의 활동에는 거의 모든 어머니와 누이들이 지지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유색인종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옥타브 페이유 기술고등학교의 교사인 이본느 장(59)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랑스 노르망디 농촌 출신인 그녀는 포루투갈이나 알제리에서 이민 온 부모를 둔 학생들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 그녀는 “최근의 소요사태는 프랑스 정부가 지난 20년 동안 유색인종의 통합정책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비용을 톡톡히 치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둔 오딜 브리종(52)은 “교외에서 청년들이 학교에 불을 지르는 것은 이민객의 자녀들이 학교를 나와야 할 일이 없는데 학교가 무슨 소용이냐는 뜻이다”라고 해석한다.
예술의 도시 파리, 역사의 위용을 자랑하는 품위 있는 건물들이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파리, 그러나 그 파리에서 전철을 타고 20분만 나가보면 교외의 황량한 콘크리트의 아파트 단지들이 마치 유령 탑처럼 서있다. 그 속에는 오늘도 ‘깨진 이민의 꿈’을 분노로 폭발시키는 젊은이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머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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