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독일의 법은 사회적 약자 보호가 최우선”

“결혼한 부부는 재산을 처분할 때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이혼할 경우 재산을 절반씩 나눠 가지며 아버지는 양육비를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1957년 제정된 독일의 가족법 일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독일처럼 부부재산제와 양육비 이행 확보를 명시한 법이 발의돼 국회에 계류돼 있다. 하지만 “이런 법이 가족 해체를 부추긴다”는 비판 여론이 강해 올해 안에 본회의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가족법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라이너 프랑크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법대 교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는 매우 중요하다”며 “한국에서도 빨리 법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0월 28일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주최로 열린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본 부부재산제와 양육비이행확보제언’ 강연회에서 열강했다. 강연이 끝난 뒤 그를 만났다.

- 최근 한국에선 독일처럼 부부재산분할, 양육비 지급 의무화 등과 관련한 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가족 해체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있다.
“법이 가족 해체를 부추긴다는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오래된 방식에서 벗어날 때 저항이 큰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선 57년 법이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법이 시행되고 있으며 가족 해체를 부추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 아이의 아버지가 양육비를 주지 않을 경우 처벌은.
“독일에선 양육비를 줄 수 있는데, 안 주는 경우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 형사처벌까지 가지 않는다. 법조항은 압박을 하는 수단일 뿐이다. 임금을 받는 근로자인 경우 법원에서 압류 명령을 받으면 사용자가 양육비를 어머니의 통장으로 지급하도록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 만약 아이의 아버지가 장기 실업상태에 있을 때는 양육비 지급이 불가능하지 않나.
“부양 의무가 있는 아버지가 양육비를 지급할 능력이 없을 경우 조부모에게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다. 조부모도 능력이 없으면 양육비 선급법에 따라 사회보장제도로 문제를 해결한다. 보조금은 아이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만 지급된다.”
- 독일에선 비혼모도 상대 남성에게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 생부는 부양 의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아이는 생부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다. 아이의 엄마는 생부에게 양육권을 청구할 수 있는데, 남성이 생부가 아니라며 거부할 때 법원은 혈액검사 등을 받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 어떤 마을에선 비혼모가 키우는 한 아이의 생부를 찾기 위해 대다수 남성이 혈액검사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 독일에선 남편이 부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재산을 처분할 수 있나.
“재산을 처분할 때 배우자의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집 같은 부동산을 처분할 때는 공증인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가 혼자 처분하기 어렵다. 공증인은 이를테면 부부가 함께 재산을 처분하려고 하는지 감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 이혼을 할 때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 사회의 오래된 전통 때문인데, 종교(가톨릭)의 영향이 크다. 가톨릭은 이혼을 금지한다. 그래서 반드시 법원에서 판결을 받아야 이혼을 할 수 있다. 최근엔 법원의 관여 없이 당사자들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관련 법을 논의하고 있다.”
- 이혼 후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양육을 맡을 경우 조건은 어떻게 되나.
“대부분 엄마가 양육권을 갖게 되는데, 자녀가 열두 살 이상이고 아버지와 살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 아버지가 양육권을 갖게 된다. 아버지가 아이를 맡는 경우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양육을 맡은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법적 보호를 받는다.”
- 독일의 법은 여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독일의 사회법은 여성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69년 혼인외자법이 만들어진 뒤 비혼모들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지역적으로 비혼모 그룹을 만들어 여러 가지를 지원하고 있는데, 오늘날 비혼모들은 혼자 아이 키우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 정부 정책이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 붕괴에 오히려 영향을 주고 있지 않나.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 소망스럽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가족들이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 통일 뒤 동독 쪽 법과의 갈등은 없었나.
“독일은 흡수 통일을 했다. 통일 뒤 동독은 서독의 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혼란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 극복해 나가고 있다.”
- 한국 가족법에 대해 평가한다면.
“가족법은 그 나라 사회의 현실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한국은 입양할 때 아이의 성과 이름을 바꾸고 출생신고도 친자로 한다. 혈연을 중시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에선 아이에게 친부모가 아니란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발달했다. 개인주의와 가족공동체주의는 모순된 관계지만 서로 존중하면 조화가 가능하다.”

라이너 프랑크 교수는 누구?
라이너 프랑크(67) 교수가 재직 중인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은 15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법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입양’ 논문으로 교수가 된 프랑크 교수는 40여 년간 독일뿐 아니라 영국, 벨기에 등의 유수 대학에서 가족법을 강의했다.
입양법, 상속법, 민법주해서 등의 저서와 130여 편의 가족법 분야 논문을 발표했다. 학문적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국제가족법학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올해 초 서울대 초빙교수로 초청돼 방한했으며 12월까지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자신이 논문 주제로 삼은 입양을 현실 생활에서 그대로 실행한 프랑크 교수는 딸 두 명을 입양해 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성한 딸들은 결혼했으며 1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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