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외된 절반’ 위해 일하고 싶어

올해 3월 호주제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남녀평등 시대에 새로운 전환기가 마련됐다. 이제 여성들 못지않게 남성들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생활 속 평등문화 정착이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 주류를 형성하는 남성 리더들의 새로운 역할 찾기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논의도 거듭되고 있다. ‘여성신문’은 ‘GS리더(Gender Sensitivity Leader)의 시대’란 기획을 통해 우리나라 대표 남성 리더들의 대여성 마인드와 함께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성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를 취재하고 자료화해 평등시대 남성과 함께 윈윈 파트너십을 이루어 가는 새 어젠다를 제시해 나가고자 한다. 이번 순서는 당에서 육아정책기획단 단장을 맡아 맹활약 중인 이계안 열린우리당 의원이다.

잘나가던 대기업의 회장에서 정치인으로 변신, 열린우리당의 육아정책기획단의 단장을 맡아 여름 한철 보육 현장을 누빈 이계안(53) 의원. 그는 지난 7월 공청회와 현장활동 등을 통해 보육대책과 관련 법안, 예산을 마련해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다짐했다. 보육 현장을 둘러본 이 의원의 소감은 ‘열악함’으로 요약된다.
“20년 경력의 어린이집 원장이 받는 월급이 165만 원이라고 했다. 보육교사들도 하루 12시간이 넘는 근로 시간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이처럼 보육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 의원은 당내뿐 아니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도 손꼽히는 ‘경제통’이다. 20대 때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45세에 현대자동차 사장, 49세에 현대캐피탈 회장에 오른 전문 경영인 출신이란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재계에 몸담고 있을 땐 절반의 세상만 보고 살았다. 정치인이 되고 난 뒤 사회에서 소외받고 살고 있는 절반의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

-보육료를 자율화해야 한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입장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보육료 자율화 논의는 시기상조다. 현재 국공립 보육시설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또 보육시설에 있는 전체 어린이의 10% 정도만 국공립 보육시설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보육의 공적 기능이 확충되고 안정된 다음에 다양한 가격의 보육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성가족부로 개편된 뒤 조직이 효율적으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기존 여성부는 양성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파하는 부처였다. 예산도 400억 원에 불과했다. 가족정책을 맡으면서 부서 명칭도 바뀌었다.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려면 인적, 물적 인프라를 갖춰야 하는데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일을 잘하려면 예산도 더 많아져야 하고 인력 보충이 필요하며 조직이 더 커져야 한다.”
-호주제 폐지 이후 여성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호주제 폐지는 2001년 여성부가 생긴 뒤 얻은 가장 큰 성과다. 상징적인 큰 차별은 없어졌지만 사회, 경제적 차별은 여전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성 인지적 측면에서 예산을 짜야 하고 재산을 분배해야 한다.” 
-여성주의적 인식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내 여성학 선생님은 아내 박명희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아내는 박사논문으로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본 고전문학’을 썼다. 뭐든지 지혜롭게 이야기하는 아내는 여성이라고 뭘 못하거나 차별받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아들만 둘을 키웠는데,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도 설거지 등 집안일을 시켰다. 아내 주변엔 여성주의자들이 많았다. 주변 친구, 선배, 선생님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여성주의를 많이 배운 것 같다.”
-여성들의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여성들의 경제 참여율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력 단절을 막는 좋은 제도를 만들고 싶은데, 현재 구상 중이다. 산전·산후 휴가제도, 보육시설 확충 등도 그 방법 중 하나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어도 남성이 군인 다녀온 것처럼 보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비정규직 여성이 많은데, 이들의 모성보호가 실제적으로 매우 어렵다. 제도를 만들려고 해도 기업의 저항도 크다.”
-공직사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여성할당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의사결정권이 있는 자리에 여성들의 적극적인 할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성할당제를 하려면 서로 노력해야 한다. 할당제에 힘입어 어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른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요즘 정부 산하 각종 위원회에 여성을 많이 할당하고 있는데 유능한 몇 명의 여성이 할당 몫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제는 해결돼야 한다.”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이 정치 활동에 어떤 도움을 주나.
“정치를 하려면 수단이 필요하다.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고급 네트워크가 있다는 점이 매우 좋다. 사기업체에서 수만여 명의 종업원을 이끄는 최고 경영자가 되는 과정 자체가 정치다. 경영인이 정치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국감이 시작됐다. 각오가 있다면.
여성가족부의 경우 정책 수행에 조직이나 인적 인프라가 잘 돼 있는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집중 점검하겠다. 예산결산위의 경우 사회 안전망 확충, 빈부의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해 효율적으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겠다. 보육예산 확보도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리더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은 열정, 끈질김, 비전이다. 21세기는 네트워크의 세상이다. 남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처럼 수직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봉사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 됐다. 나는 역사 공부를 하면서 비전을 얻는다. 재벌2세, 3세들을 만나면 프라이드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리더는 자긍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10년 뒤 어떤 모습일 것 같나.
“분명히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것이다. 공부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봉사활동이다.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 시간을 내서 봉사활동은 못 했지만 버는 돈의 10% 이상을 학교, 병원 등에 기부했다.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s)이다.”

여성선배가 여성후배 키워주는 풍토를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할 수 없지만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앞서 있는 여성들이 뒤에 따라오는 여성 후배들을 배려하고 키워야 하는데, 오히려 후배들을 힘 빠지게 하는 경우를 봤다. 여성 선배가 여성 후배를 키우고 이끌어주어야 서로 발전할 수 있다.”

힘들 때 “여성이기에 어렵다”고 말하지 말자

“평소엔 권리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어려움에 처하면 ‘여성이기에 어렵다’는 식으로 뒤로 발을 빼는 여성들이 있다. 프로답지 못한 태도다. 프로가 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긍심과 책임감을 갖는 프로가 되길 바란다.”

똑똑한 여성 직장포기 이유 아는 데 20년 흘러

이계안 의원이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70년대에 여성 동료는 전무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회사에서 만난 여성들은 대부분 부하 여직원들이었다”고 말했다.
여성주의자인 아내의 영향으로 여성주의에 눈떴다는 이 의원은 자신이 간부가 됐을 때 인사담당자에게 채용·승진 때 남녀차별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자이기에 기회를 줄 때 차별하지 않고 조직에서 키우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실망한 적이 많았다. 똑똑한 여성이라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대부분 그만뒀다.” 하지만 그의 실망은 10∼20년이 지난 지금 이해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국회에 들어와 저출산과 보육문제 등의 해결방안을 고민하다 보니 직장과 육아를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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