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항아리와 사랑에 빠진 서분례 서일농원장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30여 년 이력의 사업가로서 “사업은 ‘돈’보다 ‘성취감’ 때문에 하는 것이고, 제대로 하느라 물건이 안 팔려도 상관없다”며 “남은 생 마감 잘 하려 일 한다”는 극히 교과서적 신념을 피력하지만…그의 인생 이력을 듣노라면 이 같은 신념을 그래도 힘껏 지켜보려고 얼마나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는지 실감이 난다.
6녀 1남의 맏딸 같은 셋째 딸로 태어나 황금빛 20대를 손가락과 이마에 혹이 생길 정도로 가위질과 미싱질에 ‘코 박고’ 살다 3대 독자와 “(결혼 후) 번 것으로 친정 먹여 살려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조건에 앞뒤 재지 않고 결혼했다. 여행업 1세대로 매진하다 80년대 접어들어 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장류 사업과 양로원 짓기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결혼 후 여행업 1세대로 매진
장류사업은 인생 마지막 목표

8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화봉리에 자리한 서일농원의 서분례(58) 원장은 농원 연꽃밭에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탐스럽고 아름다운 연꽃”으로 자부하는 연꽃들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여 백련차 만들기에 매진한다. 이 때 만큼은 평생 사업인 된장 고추장 등 전통 장류 만들기 작업도 잠시 뜸해진다. 그의 농원 3만 평 가운데 2000평이 연꽃 밭인데, 5년여 전 ‘연꽃박사’로 자타가 공인하는 아산 온양 인취사의 혜민 스님이 키우는 흰 연꽃(백련)에 반해 삼고초려 끝에 그 연꽃씨를 분양받아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백련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백련차는 그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송이버섯 장아찌와 함께 유명 호텔에 추석선물로 납품돼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다.
백련차가 되고자 봉오리가 스스로 묶인 백련이 줄지어 있어 향기로 가득 찬 작업장에서 서분례씨와 마주 앉아 다기에 담긴 백련이 서서히 잎을 벌리는 모습을 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인취사 백련축제에 갔다가 그 많은 백련을 바라보는 순간 내 몸이 더럽게 느껴져 차마 연꽃을 바로 볼 수가 없더군요…정말 감동했어요. 2년간 백련 밭 주인인 혜민 스님을 연밥을 정성스레 만들어 틈나는 대로 찾아갔더니 후에 연꽃씨를 분양해주시고 백련으로 술 만들고, 차 담그는 자신만의 비법을 가르쳐주시더군요.” 
사실 그는 백련차보다는 3만여 평의 농원에 3000여 개의 전통 항아리를 보유하고 있는 뚝심으로 더 유명해졌다. 결혼과 함께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인 약 25년 전 여행사가 채 30개도 되지 않던 때, 옛 국제극장 옆에 ‘연방여행사’(현 서일여행사의 전신)를 차렸다. 남편과의 공동 경영으로 20여 년 전 태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정식 수교가 이뤄지기도 전인 17년 전 베트남에 진출하는 등 동남아 현지 여행사로 자리를 굳혔다.
“여행업이라는 게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지는 장사예요. IMF 직전 강남 테헤란로에 63빌딩 못지않은 12층짜리 빌딩을 사서 뿌듯했지만, IMF위기 속에 부도를 막기 위해 결국 헐값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그 빌딩 앞은 절대 안 지나가죠.”
남편과 아들에게 기존 여행사업을 통째로 맡기고 90년대 말부터 급선회해 본격적으로 시작한 장류 사업. 그는 단순히 전통 재래 장맛의 부활에 멈추지 않고, 여러 가지로 응용 확대해 중앙대, 충북대 등 몇몇 대학과 산학협력을 맺은 데다가 정부 지원금까지 따내 연구를 계속 확장해 밀고 나갔다. 냄새 안 나는 청국장, 달이지 않아 세포가 계속 살아 숨쉬는 간장 등 전통 맛을 유지하면서 현대인의 생활방식에 맞게 개발한 상품들 덕택에 전통장 부문에 경기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우수농원 벤처기업 등의 인증을 받았다. 치밀한 사업적 계산과 감각 이면엔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진정성이 숨어 있는데, 어찌 보면 이것이 진정한 ‘서분례’의 모습인 것 같다.

냄새 안 나는 청국장 등 개발
전통장 부문 신지식인 선정

“올해 3월에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이 있는 시엠레압에서 200㎞ 떨어진 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갔어요. 신발을 안 신은 사람이 70% 이상이고, 고아원에선 똥을 싸도 기저귀 갈 필요 없이 바닥에 쉽게 흐르라고 어린아이들을 양파 자루에 넣어 키우는, 그렇게 후진 곳이죠. 아침 8시 30분, 학교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하면 순식간에 1500명이 줄을 서요. 30여 명 정도의 봉사 인원으론 정말 역부족이죠. 그곳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세 아이의 엄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예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폐가 망가져 버렸는데, 한국에라도 데려와 살리고 싶은 생각이 정말 간절했어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한국에 돌아가면 좀 더 검소하게 잘 살아야지, 다짐하곤 하지만, 또 생활에 휩쓸리다 보면 점점 그 마음이 퇴색해버리죠. 그게 사람인가봐요.”
그는 사업 초기부터 “폼 좀 내고 싶어” 고아원, 장애인 시설 등지로 봉사활동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서울시립양로원 봉사 첫 날 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한 줌 재로 변하는 과정을 보게 됐다. 이때 “한분 한분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악착같이 살기보다는 제대로 마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지침이 섰다. 시립양로원과의 인연은 계속돼 83년 서일농원 터를 구입할 때도 처음엔 이 터를 기반으로 장차 일본 못지않은 번듯한 양로원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명문 메이지대 법대를 나와 고위직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할아버님이 한 분 계셨는데, 결국 자살을 하셨어요. 유서에 내게 유물을 남겼다고 해서 보니, 평소 신주처럼 모시던 보자기에 싼 일본 법전이었어요. 절 연단에서 태워 할아버지 명복을 빌어줬죠.”
영덕이 고향인 인연으로 서울로 유학 온 후배들이 늘 마음 쓰이던 그는, 98년 6월 종로구 사직동에 지상 3층, 지하 1층 40명 수용 규모의 기숙사 ‘영덕학사’가 문을 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지역 언론에 기금모금 공고를 내고 상당액의 기부금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고등학교 이사장과 함께 동향인 땅 주인을 찾아가 몇 시간에 걸친 밀고 당김 끝에 평당 300만 원씩 깎아 지금의 기숙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영덕군 장학회’조차도 그의 서일농원에서 발족했다.

강하고 모질게 키운 딸
사업파트너 돼 마음 ‘든든’

그가 말하는 ‘감동’이야말로 그의 사업 영감이자 원천이다. 그가 처음으로 장류에 ‘염감’을 받게 된 것은 장 담그기 선수였던 어머니의 10년 묵은 간장이 놀라운 약효를 발휘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면서부터다. 인분을 밭에 뿌리다 채독이 올라 눈이 붓고 진물이 나던 옆집 아저씨가 어머니가 담근 간장을 마시면서 씻은 듯이 나았던 것. 어머니가 왜 그렇게 장독 하나 하나를 늘 씻고 닦으며 장독대 옆에 봉숭아를 곱게 키워왔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단다. 후에 전국 방방곡곡 유명하다는 장 담그는 할머니들을 다 찾아다녀봤지만, 결론은 그의 어머니의 장맛이었다. 전통식품의 완성도에 대한 그의 욕심은 집착에 가깝다. “철저히 친환경이어야 되죠. 그러려면 좋은 고추장을 만들기 위해 고추 농사를 직접 하고, 좋은 매실 장아찌를 만들기 위해 매실 나무를 직접 심고, 좋은 장을 만들기 위해 콩 농사를 직접 할 수밖에 없죠”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
심지어 그의 이상을 공유하기 위해 지역에 ‘콩사랑회’를 만들어 “이렇게 재배하면 무조건 내가 다 사준다”고 장담, 유기농 콩 농사법을 가르쳐 줄 정도다. 이렇게 해서 콩사랑회 회원이 70여 명에 이른다. 앞으로는 장류박물관을 만들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우리 된장 고추장의 신비와 역사를 알려주고 유치원생들에게 “임꺽정도 청국장 된장 먹고 천하장사 됐단다”라고 한껏 뽐내고 싶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문득 그의 이 지극 정성 사업의 대를 누가 이을까 궁금해졌다.
“음대에서 바순을 전공한 딸이 사업을 도와주고 있죠. 딸에 대해선 남아선호 세상에서 고생하고 상처받지 않으려면 어릴 때부터 강하게 키우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고 호되게 키웠죠. 그 애가 일기장에 ‘계모 아니면 이럴 수 없다’고 제 욕을 써넣을 정도로요(웃음). 계산속 없이 끝까지 가보는 도전정신과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끈기, 겁 없음, 그리고 엄마를 닮아 좀 못된 성격, 이런 성격 때문에 사업을 잘 해나가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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