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벽’에 갇힌 사람들

서안지구에 건설 중인 640㎞의 벽 중 200㎞가 이미 완성됐다.
그 벽을 따라 사람들의 슬픈 사연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벽에 갇힌 사람들, 벽으로 분리된 사람들, 벽으로 통제 받는 사람들…. 벽 취재를 계속하던 지난 한 달 반 동안 그들의 이야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가,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고민 끝에 나는 벽 때문에 헤어진 사람들 이야기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나 자신의 필요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애태우는 가족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산가족을 찾아 나섰다. 그 중 하나가 ‘나즐랏 이사’ 마을 사람들이다.

서안지구 ‘나즐랏 이사’ 2년 전 벽으로 두 동강

‘나즐랏 이사’는 서안지구의 그린라인 선상에 있는 마을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이 마을은 이미 두 동강이 났다. 동쪽은 팔레스타인 영토인 바카 알-샤키아, 서쪽은 이스라엘 땅인 바카 알-카르비아. 그러나 그것은 그냥 관념상의 분리일 뿐 국경선도 철조망도 없었다. 사람들에겐 그냥 이웃 마을이었다. 서쪽 이스라엘 땅은 인구도 많고 경제적으로 동쪽 마을보다는 앞서 있었다. 사람들은 일터를 찾아 서쪽 마을로 옮겨가기도 하고 결혼을 하기도 했다. 두 마을은 그렇게 서로 뒤엉켜 50여 년을 살았다. 하지만 2년 전 이곳에 벽이 생겨났다. 벽은 ‘나즐랏 이사’ 마을을 완전히 두 동강 내버렸다.
이웃집에 놀러가 차를 마시며 수다 떨던 여인들은 더 이상 친구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밑반찬을 챙겨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새색시 딸도 친정 나들이가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이 오가던 마을길은 벽으로 막혀 버렸다. 옥상에 올라가 소리치면 들리는 거리인데 사람들을 이제 만나지 못한다. “육십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너무나 익숙해진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보이는 것은 벽뿐입니다. 눈만 뜨면 벽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감옥에 갇힌 죄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대문 앞을 지나는 벽을 바라보며 동네 할머니는 한숨지었다.
벽은 한 마을을 두 개의 국가로 나눠 놓았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갈 때 비자가 필요하듯 특별통행증 없이는 왕래가 불가능해졌다. 길 역시 멀어졌다. 걸어서 2분이면 갈 수 있던 곳을 이제는 차로 3∼4시간씩 돌아가야만 한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쪽을 방문하려면 통행증 발급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통행증을 얻는다 해도 길 곳곳에 있는 검문소에서 퇴짜맞고 돌아오는 게 다반사다. 사람들은 헤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며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즐랏 이사’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집 중 하나인 파이사씨의 3층 집은 공교롭게도 그린라인 선상에 위치해 있다. 이 집 담벼락을 경계로 마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으로 나뉜다. 1층과 2층은 팔레스타인 땅이지만 벽보다 높은 3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스라엘 법원은 벽보다 고도가 높은 건축물은 모두 이스라엘 소유라는 판결을 내렸다.

통행증 없인 왕래 못해 이산가족 한숨만

3층 집의 3층과 옥상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점령했다. 파이사씨는 나이 어린 아들과 딸들을 군인들과 한 집에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별채로 이사를 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시집간 큰딸 누르와 연락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벽이 세워지기 전에는 매일 얼굴을 보며 살았습니다. 딸은 아직 살림이 서툴러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집으로 달려왔고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내 즐거움이었습니다.” 딸은 이스라엘 땅인 옆 동네로 시집갔지만 이스라엘 시민권도 체류증도 없는, 말하자면 불법체류자다.
벽이 생기고 이스라엘 땅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통행 제한이 강화되면서 누르는 집밖을 나서기 힘들어졌다. “벽이 생긴 후 처음 몇 달 동안은 딸이 벽 옆으로 찾아와 1층 창문을 통해 얼굴도 보고 손도 만지고 오랫동안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3층을 이스라엘 군인들이 점령한 뒤부터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졌습니다. 자꾸 그러면 딸을 잡아갈 거라고 협박했습니다.” 이후 파이사씨는 더 이상 딸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딸의 집을 방문하려 시도해 봤지만 특별통행증 받기가 만만찮았다. “우리 집 옥상에 자리한 군인들에게 통사정했습니다. 딸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들은 냉정하게 뿌리치더군요. 결국 뒷돈을 주고 3개월을 기다린 끝에 이틀 짜리 방문증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딸과 지낼 시간도 없었습니다.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으려는 딸을 떼어놓고 돌아오는데 세상이 다 끝난 듯 느껴졌습니다.” 파이사씨는 딸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나는 그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이스라엘 땅, 딸이 사는 곳을 찾았다. 딸은 취재를 거부했다. “혹시 이스라엘 정부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면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이곳에는 남편과 두 살배기 딸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불법체류자 딸은 어머니가 보낸 영상 편지를 보며 울고 또 울었다.
누르씨 집 근처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있었다. 취재팀이 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에 퍼졌고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 소식 좀 전해 달라…모두가 내 손을 끌었다. 나는 알마즈씨의 집으로 갔다. 팔순을 넘긴 노모의 건강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 때문이었다. “어머니, 건강은 어떠신지…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노력하지만 통행증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이 도와 어머니 뵐 날이 빨리 오길 매일 기도합니다.” 그녀는 울음 때문에 짧은 메시지를 채 끝내지도 못했다. 류머티즘을 앓아 거의 걷지 못하는 알마즈씨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벽으로 안내했다. ‘이스라엘군의 허락 없이 아무도 벽 저편 마을을 방문할 수 없다. ‘무단으로 벽을 넘을 경우에는 생명위험!’ 벽 앞에는 붉은 경고판이 위압적으로 붙어 있었다. 벽에서 본 저편 마을은 정말 가까웠다. “이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어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알마즈씨는 벽에 기대 흐느꼈다.

이스라엘 “테러로부터 최소한의 방어벽”

다음날 나는 반나절이 걸리는 긴 여행 끝에 알마즈씨의 어머니 집을 찾았다. 팔순의 노모는 맨발로 나를 반겨주었다. “오는 길에 내 딸도 좀 데리고 오지….” 딸이 보낸 영상편지를 보며 어머니는 눈물 범벅이 됐다. “나는 왜 벽을 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어느 날 벽이 내 앞에 있었고 다시는 자식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벽이 필요한지 누가 대답 좀 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취재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나는 이스라엘 외무부 대변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벽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하는 불편을 이해합니다. 그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우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어려움은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벽은 삶 그 자체입니다. 벽은 테러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방어벽입니다. 삶의 질과 삶 그 자체의 문제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한 일 아닙니까….”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는다는 것, 그런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상상하기 힘든 공포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죽음만이 고통의 최대치일까? “부모가 자식 얼굴도 못보고 사는 것을 어찌 산다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삶이 있는 법입니다.” 팔순의 어머니는 그렇게 절규했지만 이스라엘 외무부 대변인은 그 절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함께 할 수 없는 커다란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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