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효당과 원화

19세기 중엽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으로 인해 불지펴졌던 한국의 차 문화는 구한말 외세침탈의 어수선한 시기와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다시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 듯 비쳐진다. 광복 이후 차와 함께 한 초의선사의 삶을 세상에 알리고 한국 차를 문화생활의 전면에 등장시킨 데는 효당(曉堂) 최범술(1904∼79) 스님의 역할이 컸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지극히 아꼈던 효당 스님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고향인 경남 사천 다솔사에 출가한 뒤 독립운동과 옥살이를 반복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믿음을 다져온 터였다. 광복 이후 고향 사천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대처승이었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으나 이미 불이(不二)의 대도를 체득한 효당에게 그러한 비판은 개의할 바 아니었다.
하화중생의 삶을 살던 효당이 한국차문화계를 조직화하고 부흥의 기틀을 다듬은 이면에는 재혼한 부인 원화(元和) 채정복(58·서울 종로구 가회동)씨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은 42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부처님 전에 백년가약을 맺어 한국 차 문화사에 신화가 됐다. 두 사람은 도반으로, 스승과 제자로, 부부의 연을 이어갔다. 효당이 77년 한국차도회(韓國茶道會) 결성을 주도해 한국 차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을 때도 실상 일을 종용하고 추진한 것은 원화였다. 차도회 결성에는 아인 박종한, 청남 오제봉, 토우 김종희, 의제 허백련 등 100명이 힘을 보탰고, 한국 최대 규모 차회가 된 한국차인회(韓國茶人會) 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화는 스님이 돌아가신 뒤 칩거하다가 83년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자리에 한국효당차도본가(韓國曉堂茶道本家)라는 간판을 내걸고 스스로 한국 선차(禪茶)수련의 개조(開祖)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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