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니메일] (79)

어쩌다 보니 한 주일에 평균 대여섯 권의 책을 새로 만나게 된다(이게 많은 건지 적은 건지는 잘 모르겠군). 짬만 나면 서점들을 찾아 휘휘 둘러보는 취미도 아직껏 고수하고 있으려니와 이런저런 경로로 알게 된 출판사나 지인들이 보내오는 책들도 꽤 되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활자 세대이다. 나 역시 대부분의 우리 또래답게 활자중독증 환자인 데다 고맙게도 이 나이에도 쓸만한 시력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일단 손에 들어오면 그 즉시 머뭇거리지 않고 읽어 치운다. 그렇게 독서를 많이 하니 아는 것도 많겠다고? 천만에. 그게 그렇지 않다. 어느 시점부터 점점 기억력이 떨어져 가는 데다 천성의 게으름 탓에 메모하는 습관도 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중에 감명 깊었던 부분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지기 일쑤여서 어떨 때는 도대체 내가 왜 책을 그렇게 읽어대는지 나로서도 영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재테크나 건강서적 같은 실용서적 빼놓고는 문학작품이건 인문교양서건 만화책이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 요즘은 쓰는 이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나는 책, 자전적 에세이라고 하나? 그런 책들이 점점 더 다가온다. 흔히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젠 길 찾기보다 나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 모습에서 더 흥미를, 아니 공감 또는 위안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일생 동안 나는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일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나 아무도 엄두를 못 내던 일들을 꾸준히 실천해 온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평소 막연하게 존경심을 품되 나에게선 멀리 밀어 놓았던 이들이 갑자기 팔짱을 끼고 싶어질 만큼 가깝게 여겨진다.

지난주에는 그런 책을 한꺼번에 두 권이나 읽었다. ‘부스러기가 꽃이 되다’(강명순 지음)와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김혜원 지음). 20대 신혼시절부터 가난한 동네에 터를 잡고 빈곤아동 퇴치운동을 줄기차게 추진해온 강명순 씨와 중년의 전업주부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 30년 동안 사형수들의 큰누이가 돼주면서 사형폐지 운동을 벌여온 김혜원 씨. 중년과 노년이라는 각기 다른 연령대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두 여성이 치열하게 살아온 이야기에 파묻히니 우리의 척박한 사회사가 자연스레 드러나고 인간이 왜 꽃보다 아름다운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평소에도 두 여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던 만큼 멀리서 존경해오던 터였고, 특히 강명순 씨에 대해서는 먹고 살만한 중산층 여성으로서 막연한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그것을 매달 소액의 후원금을 보내는 걸로 얼버무려 왔었다. 게다가 여러 인연으로 두 여성과는 개인적으로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나하고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일정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책의 힘은 컸다. 책에서 읽은 그들은 나와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그들도 때로는 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토록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해온 활동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 그 욕심이 그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이 곳곳에 녹아 있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흐뭇하게 했다. 그리고 조금은 생뚱하겠지만 그들이 책을 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훌륭한 일을 하는 많은 사람이 책 쓰는 일을 부박한 짓으로 치부하고 조용히 살겠노라 고집하지만, 그러나 책을 통해서 그들의 뜻을 펴나가는 것도 또 다른 기여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훌륭한 콘텐츠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나는 이 방면에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다) 만나기만 하면 ‘책을 쓰세요’라고 권하게 된다. 훌륭한 콘텐츠의 기준이 뭐냐고요? 일단 한 분야를 30년쯤 파고든 사람이면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 30년 동안 생물을 가르쳤거나, 30년 동안 외항선을 탔거나. 아무튼 열심히 산 사람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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