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리뷰] 모성신화에 반기 든 ‘마더’

난 모성 신화를 믿지 않는다. 세상 어느 어머니도 자식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무한대의 애정을 베풀진 않는다. 내 어머니, 친척, 친구의 어머니를 보아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유무형의 대가를 기대하며 자식에게 일시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신도 대가 없는 무한대 애정을 베풀지 않는데, 왜 어머니에겐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일까? 모성 신화가 허구임을 알고 나면 어머니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딸들도 해방된다.

로저 미첼 감독의 ‘마더’는 ‘딸의 남자를 사랑하다’에 방점을 찍고 광고하고 있다. 아니 딸의 애인을 사랑하면 어떤가? 내가 끌리고 그가 끌리는데 사랑하면 그뿐이지. 딸과 그가 결혼이라는 법 제도하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닌데. 딸과 그가 부부라면 물론 그를 사랑해선 안 된다. 더불어 숨쉬고 싶지 않은 인간이 득실대는 세상이니, 악법이라도 지키는 것이 그나마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마더’는 딸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생각거리를 남긴다. 늙음과 죽음, 그 사이에 남아있는 시간, 시든 육체에 남아있던 욕망과 뜻밖의 환희. 딸의 남자와의 육체 관계는 이런 화두를 던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어머니에게 있어 딸의 남자는 단지 이런 존재일 뿐이다. 완전히 꺼져버렸다며 방치했던 육체에 욕망의 불을 지펴주고, 그로 인해 노쇠의 두려움, 죽음의 공포를 잊고 삶의 의욕과 환희를 되살려준 사람. 그런데 왜 하필 딸의 남자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늙은 남편으로 인해 노쇠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바로 그 때, 어머니 눈에 육체 노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남자의 몸이 보였기 때문이다. 딸의 남자가 아닌 그 무엇, 오랜만에 쓴 글로 인해 문학 소녀의 꿈이 되살아났다면 그것이 홀로 된 노년에 살아갈 힘을 주는 에너지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딸의 남자는 어머니에게 있어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어머니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깨닫는다. 딸의 남자가 정신적 동반자까지 되기에는 미성숙하고 너무 젊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아들과 딸, 그리고 딸의 남자에게 이렇다할 변명도 않고 홀로 여행을 떠난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마더’의 어머니처럼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고 여행을 떠나면 좋겠다. 남의 눈이 무섭고 자식의 앞날을 그르칠까봐, 꾹 참고 희생해 왔노라며 후회하고 원망하는 말로 자식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보다, 이 편이 자식에게도 편하다.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할머니 나이에 육체의 환희가 가능할까? 영화는 늘 과장한다니까. ‘손녀의 남자를 사랑했네’란 영화가 나오는 건 시간 문제겠어” 나의 답. “‘손녀의 여자를 사랑했네’도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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