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JPG

*최영미시인

“사람살려, 사람 좀 살려주세요”낯익은 목소리. 시인 최영미

(37)였다.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있다. 최영미는 간신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바로 뒤 한 남자가 두 남자에게 붙들린 채 걸어나온

다. 이 남자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4월 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월간〈사회평론 길〉지령100호 기념리셉션

에서 있었던 일이다. 잠깐의 소동을 보며 순간 2년전 바로 이

장소에서 벌어진 비슷한 광경이떠올랐다. 96년 2월 〈창작과비

평사〉30주년 기념리셉션. 그때 최영미는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다만 “또 그사람이 나타났어요”라며 쫓기듯이 세종홀을 빠

져나갔다. 그의 얼굴엔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쫓는’남자는 동일하다. 이상용씨(36). 고

대 법학과 81학번. 대학졸업후 고시를 수차례 쳤으나 계속 낙방

했다고 한다. 현재 구체적인 직업은 없다. 그를 본 사람은 한결

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말을 한다.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안기부에서 계속 나를 쫓고 있다”는 것. 그가 최영미를

‘쫓기’시작한 때는 지난 94년 11월이다. 그날 오후 2시 교보문

고 10층‘저자와의 대화’에서 소동을 벌인 것이 이상용씨의 첫

모습이다. 그뒤 95년 5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또 한차례의

난동을 벌인 이후 최영미씨의 자택과 자주 들르는 출판사, 행사

장에 줄곧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고 시에 쓰지 않았느냐”며 최영미에게

말을 걸었고 최영미는 “난 당신을 본 적도 없고, 좋아한 적도

없다”는 대답만을 해줬다. 그러기를 만 4년. 그동안 집도 옮기

고 전화번호도 수차례 바꿨다.

물론 전적으로 이상용씨 때문만은 아니다. 정도는 약하지만 비

슷한 협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그의 추적을 피

하기 위해서였다.

리셉션에서 최영미는 그가 자신을 안았는지, 덮쳤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누군가의 발에 걸려 주저앉았고 돌아보

니 그가 나타난 것을 본 것이다.

비명을 질렀고, 소동이 벌어졌다. 이상용씨는 자신을 말리는 사람

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가운데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그의 주먹

을 맞았다. 그가 종로 경찰서에 전화를 했고, 곧바로 경찰은 출

동했다. 이상용씨는 현장범으로 체포됐다. 경찰서에서 그는 또

한차례 난동을 벌였다. “할복자살하겠다”며 경찰에게도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오후 10시. 이상용씨는 불구속 입건 됐다. 이것

으로 그날의 소동은 끝났다.

최영미씨가 서울지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사건 36일만인 5

월 11일이다. 경찰의 진술조서에 보충할 것이 있으니 서울지검에

출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12일 오후 3시 서울지검 706호. 검사

는 당시의 상황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다. 최영미씨는 구속은 원치 않는다, 다시 이런 일을 하

지 않을 정도로 따끔한 혼을 낼 수 있는 처벌이었으면 한다고 말

했다. 검사는 약식재판을 하면 5월말경이나 6월초순 정도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일러준다.

3호선 교대역에서 일산방향 전철을 탔다. 퇴근시간이라 전철은

붐볐다. 금호역을 지날 무렵. 40대중반 남자가 최영미의 팔을 치

며 “혹시, 시인 최영미씨 아닌가요”묻는다. 최영미씨는 강하

게 부인했다.“아니에요. 많이 닮았다는 소릴 듣는데, 전 아니에

요.”고개숙인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옥수역에서

내렸다.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그사람, 별뜻 없이 말한 것 같기도 했는데요” “그렇죠? 이제

제가 너무 예민해졌어요. 그 사람이 팔만 치지 않았어도 안 그

랬을 텐데...” 말끝은 흐리는 그는 몹시 지쳐보였다.

유명인, 스타, 저명인사‘단골’최근에는 일반인들도 증가추세

최영미씨‘사건’을 이시형 박사(강북삼성병원 전문의)는 스토

킹 범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스토킹(stalking)은 상대가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좋아서 따라다니는 행위를 일컫는 용

어. 90년대 들어 미국, 일본에서이런 범죄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면서 학계에서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스토크를 하는

행위를 스토킹, 스토크를 하는사람을 스토커로 통칭한다.

스토킹 피해는 유명인과 스타,저명인사들에게 특히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한

국성폭력상담소(소장 최영애)에 따르면 여성들이 가장 많이 호소

하는 스토킹의 유형은 옛애인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경우라고 한

다. 졸업후 곧바로 취직해 별탈없이 회사를 다니던 김모씨(29)

는 96년말 대학시절 헤어진 남자가 갑자기 찾아와“결혼하자, 그

렇지 않으면 같이 죽자”며 1년을 쫓아다니는 바람에 올해초 결

국 한국을 떠났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고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스토킹 피해

도 최근 증가하는 추세라고 상담소측은 밝힌다. 우연히 스친 사

람을 첫눈에 반해 계속 따라 다니다가 나중에‘사고’를 친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5개월째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양

모씨(27)는 매일 집앞에 놓인 장미꽃을 보며 출근한다. 양모씨에

게 접근하는 스토커는 매일같이 장미꽃을 배달하는가 하면, 때로

는 출근길을 막고 “나의 이상형이다, 같이 살자”며 떼를 쓴다

는 것이다. 심각한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양씨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어머

니와 여동생이 가족의 전부여서 저녁 귀가 시간뿐만 아니라 집에

가만히 있어도 겁이 난다고 털어놓는다.

스토커 80-90% 남성 정상인도 상당수

그렇다면 스토커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강북삼성병원, 삼성생

명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성균관의대에서 전문의 상담 및 민간상

담소의 사례와 경찰진술서 등을 토대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스

토커의 80-90%가 남자이며 대개 20세에서 60세까지 광범위하고

평균 35세 내외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대체로 외톨이이지만

지능은 평균수준 이상, 학력은고졸이상이며 직업은 일정치 않

으나 유형에 따라서 괜찮은 직종인 경우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

다. 특히 편집증인 경우 강한 집념으로 인해 아주 우수한 업무성

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경우도있으며 대개 정신과적으로 문제

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얼른 보기에는 보통사람인 경우도 상당

수인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들이 어느정도 피해경험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강북삼성병원이 원내 간호사 1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피해경험이 있는 여성은 33%인 것으로

집계됐다. 스토커들은 주로 전화협박과 미행, 편지쓰기, 선물하

기, 호출 등을 일삼았고 심한 경우 여성을 끌고가기도 했다는 응

답이다. 이와 관련해 이시형 박사는“스토킹 범죄는 이제 신종

여성범죄로 인정할 만하다”고 조언한다.

경찰, 스토킹 범죄 이해못해

스토킹 범죄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범죄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아

해결책이 피해자가 도피하는 수준정도라는 데 있다. 보호받을

수 있는 법률에 대한 인식이 없고 상담기관과 경찰기관도 이 범

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현재로선 경범죄 처벌법을 위시해서 성폭력 특별법과 이번 7월

부터 시행되는 가정폭력방지법에의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불안감 조성, 장난전화, 통신매체, 음란죄 등은 처벌

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스토킹 피해는 정도가 심할 경우 경찰

신고가 가장 먼저라고 조언한다. 경찰의 경고가 그래도 스토커들

에게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찰 역시 스토킹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스토킹

범죄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데 있다. 경찰에 신병요청을 해

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고소를 하려고 해도 경찰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오히려 자기가

의심받는 것이 더 힘들다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뭔가 한짓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꼬리를쳤으니까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느

냐”고 몰아부치는 주위의 편견이 참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토킹 범죄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시

작해야 할 시점이다.

'최진숙 기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