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도 남성도 엘리트도 아닌 여성집단의 목소리 담아낼 통로부터 체계화/정교화해야

대학원 ‘여성과 일’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주제와 관련하여 학생들이 지닌 여성학적 감수성에 걸리는 일상적 문제들을 찾아보라는 필자의 요구에 한 학생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관한 기사를 제출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용은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여성을 위해 싸운 훌륭한 것인데, 왠지 불편해요”

기사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노동조합이 수용하고 적극 나서서 요구를 관철시킨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노조 실무자인 ‘○아무개동지’의 헌신적이고 철저한 활동의 후기로 서술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자신은 정규직 노동자이면서도 개인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거의 영웅적이기까지 한 미담(美談)의 주인공은 물론 ‘남성’이었다.

무엇이 이 ‘훌륭한’ 투쟁담을 읽는 학생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까? 필자는 이를 ‘거대한 영웅담론에 묻힌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구조로 해석했다. 수십 명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과 눈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노동조합에 대한 문제제기, 고용안정 확보를 위한 요구 등은 거대 담론을 떠받치는 기둥이며 사건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일 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어디에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기심을 뛰어넘은 현명한 남성 간부의 투쟁 결과 비정규직의 고역에서 해방된 ‘수혜자들’로서, 무대의 뒷면에 있었다.

정책 또한 이와 비슷하다. 여성학자들은 국가정책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해 왔다. 여성정책이든, 성인지적 정책이든 필자는 여성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수혜자로 전제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그런 정책은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성단체들에 사업 내용은 상관없이 나눠주기 식의 금전적 지원을 한다든지, 이런 저런 필요에 따라 여성들을 동원하는 것, 또 파트너십을 외치면서도 관료제적 경직성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으려는 태도들은 여성들을 종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나쁜 관행들이다. 서구에서 제기되어 온 ‘복지에 의존하는 어머니(welfare mother)’ 담론이나 여성조직들이 사회복지기구화하고 있다는 지적은 이러한 나쁜 관행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여성을 주체화하고 여성의 힘을 키우는(empowerment) 정책은 어떻게 가능할까? 필자는 첫걸음으로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주장하고 싶다. 국가나 정부, 엘리트 집단이 뭐라고 규정하지 말고, 정책에 관련된 여성 집단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물론 여성집단의 목소리가 하나는 아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다중적 정체성(multiple identities)과 다양한 목소리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들릴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채널과 방법을 마련하라. 여성을 주체로 만들어 가는 정책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노동운동 사례에서 빠진 것은 비정규직 여성들의 목소리이다. 삼십 명이든 사십 명이든 비정규직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하나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거대 담론을 해체하고, 그 틈을 비집고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진정한 여성정책은 시작될 수 있다. 그 통로를 체계화·정교화하는 것이 현재 정책의 주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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