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마라톤대회에서 만난 60세의 아마추어 여성 마라토너와 20년 전 영화 '달리는 여인'의 조안 우드워드가 준 상큼한 감동…내년에는 걷지 말고 달려 볼까나

“아, 거기 갔다 오시는군요?”

“네? 아, 네∼”

“저도 거기 갔다가 여기 들러서 점심 먹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우린 초면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오래된 이웃처럼 인사를 '땡겼다'. 물론 낯가림이 심한 나로선 어림없는 일이다.

전적으로 상대편의 놀라운 친화력 덕분이었다.

도대체 '거기'는 어딘가. 5월 첫날,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여성마라톤대회였다.

그럼 '여기'는 어딜까. 지하철 2호선 당산역을 막 출발한 전동차 속이었다.

3킬로미터 걷기에 함께 참여한 친구와 나는 주최 측에서 나눠 준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당산역에서 친구가 내리자마자 그 자리에 앉은 그 여성은 완벽한 등산복 차림을 갖추고 있었다.

자그맣고 날씬한 체격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중년 여성이었다.

“뛰셨어요?”

그가 물었다.

“아뇨, 걸었어요”

“아유, 왜 걸으셨을까. 뛰시지 않고. 전 10킬로미터 뛰었는데”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달리기 경력과 달리기의 장점에 대하여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등산을 즐겨서 안 가본 산이 없었는데 2년 전부터 딸이 아이를 맡기는 바람에 보육과 운동을 겸할 수 있는 달리기로 전환했다는 것. 요즘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씩 달리고 들어온다는 것, 아침 7시에 출근하는 딸을 보내고 손자를 돌본다는 것, 휴일에는 각종 마라톤 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한다는 것, 달리는 동안 느끼는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

마치 소녀처럼 열정적으로 달리기 예찬론을 펼치더니 자기가 10킬로미터 이상을 안 뛰는 건 나이를 고려해서란다.

환갑 노인이 공연한 욕심을 냈다간 필경 탈이 나기 때문이란다. 아니, 이 젊은 마라토너가 예순 살이라고? 정말 놀랍군. 다행히 내 나이는 묻지 않아 주었다.

그런데 정작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이 달리기를 항상 혼자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아무도 자신의 달리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섭섭할 것도 없단다. 평소 신문을 열심히 보다가 마라톤 관련기사가 나면 혼자 신청해서 혼자 참가한다나.

아마 내가 몹시 비리비리해 보였나 보다. 몇 번씩이고 힘주어 달리기를 권하다가 그는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면서 깔깔 웃었다. 유쾌한 만남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 문득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영화를 떠올렸다. 20여 년 전 어느 주말 밤 TV에서 틀어준 영화. 제목은? 소박하게도 '달리는 여인'이었다. 일로 바쁜 남편은 그 날도 아직 귀가하지 않았고 하루 종일 소란스럽던 아이들은 다 잠이 든 시간이었다. 별 기대 없이 습관대로 무심코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주인공이 내가 좋아하던 폴 뉴먼의 아내 조안 우드워드였다는 사실이 그나마 관심을 끄는 정도였다.

이혼하고 딸들과 함께 사는 중년 여성이 어느 날부터 달리기를 통해 자아를 찾아간다는, 조금은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난 너하곤 달라라며 그냥 멀찍이 있는 구경거리로만 보이던 미국 중년여성의 삶이 어느새 내 삶과 겹쳐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내 속 깊이 눌러 놓았던 자아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조안 우드워드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서 모두가 떠난 결승점을 비틀비틀 걸어 들어오던 마지막 장면에선 아예 마음 놓고 통곡하기까지 했다. 영화의 힘이라니.

달리는 여인들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나도 내년에는 걷지 말고 달려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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