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백화점에 갔다. 문만 들어서면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평소엔 아주 가기 싫어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한참 동안 안 가다 보면 또 나만 너무 시류에 뒤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조감 같은 게 들기도 한다.

게다가 뻔질나게 선전하는 세일기간을 그냥 넘기면 왠지 큰 손해를 본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도 백화점이란 곳이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들르게 된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후회할 줄 뻔히 알면서도.

엊그제도 그랬다. 딱히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로수에는 연녹색 잎들이 돋았고, 일은 일찍 끝났고, 기분은 약간 우울했고, 세일기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백화점에 들르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오랜만에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백화점 문을 밀고 들어갔다. 대통령 말대로 경제가 완전히 회복된 덕분인가,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나는 문득 느낌이 달랐다. 예전 같으면 젊거나 중년층 여성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손님들 가운데 나이 든 여성들이 부쩍 눈에 띄는 것이었다. 나이 듦의 기준이 뭐냐고? 그야 대충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지 뭐.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만은 실제 나이보다 10년쯤 젊어 보이리라는 착각 속에 산다는 말도 있긴 하지. 그렇지만 불변의 진리 하나, 그것은 아무리 젊어 보이려 애를 써도 또래는 또래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날 내 눈에는 나이 든 이들이 떼거리로 들어왔다. 전에도 물론 그들이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젊은이들의 무리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소수로 흩어져 다녔다. 그러던 그들이 갑자기 무리를 지어 무대의 중앙을 휘젓고 다니는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 고령화 사회로 들어선 게 언제인데.

그들은 예전처럼 딸이나 며느리의 뒤를 따라 다니는 촌스러운 어머니들이 아니라 혼자 또는 또래끼리 어울려 나온 멋쟁이 여성들이었다. 아무리 젊게 봐줘도 여든 가까이 되었음직한 한 여성은 무대의상 같은 옷차림에 화려한 모자까지 갖춘 모습이 은퇴한 여배우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고 60대 후반쯤일 듯한 어떤 여성들은 LA에서 몇 십 년 살다 온 듯한, 전형적인 미국 할머니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어느 누구를 봐도 소위 전통적인 한국의 어머니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였고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패션감각이 뛰어난 여성들이었다(솔직히 백화점에 가기 싫은 데는 이런 콤플렉스도 작용한다).

그 발랄한 나이 든 여성들은 고급매장에 걸린 최신 디자인의 옷들을 이것저것 입어보며 서로서로 권하느라고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남의 눈에 뜨이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칙칙한 옷들을 선호하기 마련이라는 게 이제까지 노인의 패션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연두나 분홍 등 화사한 색깔의 옷에 손이 갔다. 이런 색깔에 끌리는 걸 보니 나도 이젠 나이 들었나 보다며 유쾌하게 한탄하면서.

세상은 이렇게 바뀌는 거구나. 슬금슬금 바뀌다가 어느 순간 확 바뀌는 거구나. 또 젊은이만 변하는 게 아니라 나이 든 이들도 변하고 있구나. 중년 여성들이 '아줌마'라는 틀을 깨뜨려 나가듯 이제 나이 든 여성들이 '할머니'라는 틀을 깨뜨리고 있구나. 이들이 암울하게만 다가오는 노령사회에서 새로운 노인여성 이미지를 만들어 나갈 첫 세대들이로구나. 나는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 한껏 흥분해서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사실 최근 들어 나이 든 여성의 이미지는 많이 바뀌었다. 경제력 없고, 에너지 없고, 희생만 하는 칙칙한 이미지에서 남성보다 훨씬 여유 있고 힘 있는 밝은 이미지로. 척박한 풍토에서도 평생 자기 세계를 이루어나갔던 소수의 엘리트 여성들을 통해서도 그렇고, 나이 60을 넘기고도 꾸준히 활동하는 예술인들을 통해서도 그렇다. 특히 탤런트 김혜자씨나 여운계씨, 가수 이미자씨나 패티김씨, 그리고 연극배우 박정자씨나 손숙씨 등과 같은 대중예술인들은 나이 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나는 일부 특별한 여성들을 빼놓으면, 소위 '보통여자'들은 아직은 바뀌지 않았으리라고, 그들이 변하려면 한참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생산하는 여성과 소비하는 여성을 따로 떼어놓고 노골적으로 우열을 매긴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건방진! 물론 그 날 내가 감지한 변화의 징후는 전체 여성들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 그것도 그들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반대쪽에는 생존에 허덕이는 남루한 노인 여성들의 이미지가 자리할 테고.

하지만 어쨌든 한쪽에서나마 대중적인 노인여성 이미지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 그들을 보면 2018년 이후 우리의 노령사회는 예상보다 한결 밝을지도 모르겠다.

그 날 나도 진분홍 빛 점퍼를 하나 샀다. 거금을 주고.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