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내가 그 수많은 정서적, 경제적, 통념적 고정관념을 이기고 혼자서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그 사실이 스스로도 너무 대견해 자주 들어가는 칼럼방에 이런 나의 운전 성공기를 써서 올렸다. 답글이 몇 개 달렸는데, 5년 넘은 장롱면허를 꺼내든 용기와 그 나이에 대단하다는 등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용기 백배하여 조심조심, 천천히, 남들은 20분이면 갈 길을 50분씩 걸려가며 운전을 익히다가 다시 경과보고를 하려고 칼럼방을 들어가 봤더니 담당기자란 아이디로 “한심하네…완전 부르주아군. 택시만 타고 다니면 알 턱이 있나…”라는 아주 생뚱한 답글이 하나 올라붙어 있었다. 아,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내가 진짜로 운전을 하게 되면 만나게 될 그런 부류의 무작정의 안티세력임을. 기분 나쁜 것은 물론, 처음으로 들어본 '부르주아'라는 욕(?) 앞에서 희한한 반성 겸 억울함에 울컥 하는 심정이었다. 삼시 세끼 먹을 것 없어 걱정하지 않으니 그래 부르주아, 맞다. 집 없어 거리에서 추워 떨지 않으니 부르주아, 맞다. 강북 오지일망정 작은 집 있으니 부르주아다, 고물 차일망정 남편 차 있으니 부르주아다, 고액 과외 한번 못해봤으나 아이 둘 다 학교를 잘 다니고 있으니 나는 부자다. 몇 년 벌어 한 푼 두 푼 저축한 돈으로 외국여행도 하니 배부른 여자인 것도 맞다. 두둑한 통장 한번 가져본 적 없고 두툼한 지갑 한번 호기롭게 휘두른 기억도 없지만 어디 가서 구걸해 본 적도 없으니…그래. 그것이 다 맞는다 쳐도 이것이 왜 내가 한심한 부르주아라고 욕 먹을 일인가 말이다. 작은 집과 건강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에 내가 가슴깊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더 큰 욕심도 내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사는 일이, 이 나이에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왜 낯도 모르는 사람에게 비난받을 일인가 말이다. 또 도식적으로 남녀를 갈라 말한다고 답글을 썼던 그는 욕하겠지만 상황을 바꾸어서 나이 마흔한 살의 남자가 일하면서 택시 몇 번 탔다면, 그 나이에 간신히 운전을 하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과연 부르주아라는 이름으로 비난받을까?
말이 길어졌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었다. 부르주아도 아닌 것이 부르주아로 내몰리고, 심지어 한심한 여자 부르주아로 몰리고 싶진 않다고. 제대로 보라고, 진짜 한심한 부르주아는 분명 내가 아닐 거라고…침소봉대한 오버였다면 웃고 넘기시기를.
권혁란/ 이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