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여성들을 대할 때 느끼는 한계가 있다. '여성'이기 전에 능력 있는 하나의 인간으로 봐 달라는 무언의 주문. 때론 '여성'임을 잊었기에 여기까지 왔노라 하는 확신도 내비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왠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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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방송현장에서 뛰면서도 지역여성들과의 연대 끈을 놓치 않았던 임나혜숙 마산 MBC 편성국장. “여성운동은 내 어머니, 주위 여성들은 내 재산” 이란 확신으로 늘 즐겁다.

지난 3월 지방MBC '첫' 여성국장이란 타이틀로 주목받은 임나혜숙(47) 마산MBC 편성국장을 만나는 것은 편하고 즐겁다.

그는 80년대 초 지역 여성운동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자르고 싶어도 지역여성 네트워크가 무서워 자르지 못했”기에 여성운동 덕분에 국장이 됐다는 소감부터 피력한다(지역여성들의 사랑방 카페 '반'을 만들어 경남여성회를 태동시킨 당사자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 단체 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감사하는 것은 여성운동이 자신을 비로소 '인간'으로 만들어줬다는 점이다. 여성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우리 사회 소수 약자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끊임없이 환기시켰고, 이것이 곧 '방송'을 통해 발현될 수 있었으므로. 그가 당당히 사용하는 이메일 아이디 '마녀 임나혜숙', 그 마녀가 남성 텃밭을 극복하고 굳건히 서기까지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을 터였다.

마산 MBC 첫 여성 노조위원장에서

첫 여성국장으로 주목받아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마산MBC의 개편방송이 막 시작된 4월 25일 그를 만났다.

TV와 라디오 양쪽 편성 책임자로서 개편 주요 방향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임나 국장은 “정부에서도 성인지 예산과 정책을 펴지 않나? 이제 방송 프로그램도 그렇게 돼야 하지 않겠나?”라는 반문부터 한다.

88년 마산MBC 노조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임나 국장에 비해 입사 동기인 박진해 신임 사장은 그 10년 후 노조 위원장이 된 인연이 있다. 전국적으로 지역 언론사에선 처음으로 노조 출범을 주도했을 당시 “머리가 나빠 양보할 줄 모르고, 무식해서 용감하다”며 만삭의 몸으로 사장 앞에 드러눕기까지 했던 임나 국장은 이번에도 “사장에게 당신과 코드가 안 맞는다고 밝히면서 건전한 안티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임나 국장은 천성적으로 '시사꾼'이다. 편성제작국이란 곳이 기자만 빼고 PD, 아나운서, 작가,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 등 방송국의 모든 인력이 총집합한 곳이지만, 그는 유별나게 뉴스에 가장 진한 애정과 관심을 쏟는다.

팬클럽까지 생겨 지난해 방송 10주년 행사까지 성대하게 치른 마산MBC 라디오의 간판 시사비평 프로그램 '아구 할매'는 아직까지도 그가 진행을 맡고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으로, 곧 그 자신이다. 수도권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지역 특성을 십분 발휘해 걸쭉한 토종 사투리로 진행된다.

'건전 안티'로 거듭 좌천당하면서도

시사프로 '아구할매' 성공시켜

“매일 매일 욕먹고 징계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괴로움을 당했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스태프들과 우리가 뭐 잘못 한 거 있나 고민하며 심상해 하곤 했다”며 “그때 1명의 안티 뒤에 100명의 지지자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아구 할매'의 성공만 본다면, 그가 시사 프로그램만 전문으로 만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누군가의 평대로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심지어 가요 프로그램까지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반드시 시사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하곤 한다.

반골의 거침없는 기질로 골고루 전임 사장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그이기에 기자에서 당시 한직이던 가요 프로그램 PD로 80∼90년대를 전전했지만, 자신의 프로그램에 운동가요를 틀어주고 전교조 운동이 뜨거운 감자일 때 전교조 운동 교사들을 출연시키고 자살한 중고생들의 유서를 읽어주기까지 했다. 최근 2002, 2003년에도 그는 다시 좌절해야 했다.

한창 재미를 붙이던 시사 프로그램에서 손을 떼고 백화점 현장에서 '열전 노래방'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 손발을 묶이는 느낌에 “스태프들과 함께 붙잡고 울었다”고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엔 일순 물기가 스미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캔디'처럼 일어섰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백화점 측에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를 만들게 했고, 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을 노래방에 출연시키면서 응원상까지 만들어 참여 열기를 북돋웠다. 나중엔 그 백화점에 사람이 넘쳐나 절로 매출이 엄청나게 치솟았고, 처음에 그를 싫어하던 백화점 점장은 당시 마산MBC 사장에게 “나와 이데올로기는 다르지만 마산MBC에서 제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우리 백화점에서 평생 저 프로그램만 진행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감탄했다. 곧이어 그는 2004년 보직부장으로 발령났다.

아줌마·여성장애인 향한 뜨거운 애정

“기다려주면 백프로 능력 발휘”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2003년 어린이날이던가, 잘릴 각오를 하고 자폐아들을 열전 노래방에 출연시켰던 일이다. 1시간 프로그램 내내 자폐아들의 '으∼으∼으…' 노랫소리가 이어졌으니 방송사고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다음날 장애아 부모들과 관계자들로부터 엄청난 격려 전화가 쏟아졌다. 그러면서 절감했다. 장애인, 더구나 여성 장애인이야말로 우리 시대 식민지적 입장에 처한 마지막 사람들이구나 하는…” 그래서 그는 '경남여성장애인연대'를 발족 때부터 지켜보며 후원하고 있다.

최근 '아구 할매' 작가 3명 중 1명을 경남여성장애인연대 활동가로 발탁해 소수 인권의 감수성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개편의 막이 오른 25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이 장애여성 작가의 휠체어를 태울 수 있도록 자신의 차의 좌석 일부를 들어내 뜯어내기까지 했다.

'아줌마'에 대한 애정도 뜨겁다.

“아줌마들은 아무리 구박(?)해도 강한 생활력으로 버텨내곤 한다. 3개월만 참아봐라. 펌프질이 처음엔 어렵지만 일단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콸∼콸∼ 시원하게 쏟아지듯 아줌마 스태프들은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여성인재가 곧 재산'이라는 굳은 신념이 있다. 세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성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기에 경남 지역엔 어머니 급식당번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성학자 조주은씨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아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어머니급식당번폐지모임'에 열심이다.

“난 여성운동 세대로 치자면 1세대에 가까워 억수로 사명감을 머리에 이고 늘 싸울 준비를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젠 후배들에게 행복한 멘토로 비치고 싶다. 화장실에 붙여놓고 애송하는 시가 한 편 있다.

노래하라, 아무도 안 듣는 것처럼

춤춰라, 아무도 안 보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입지 않은 것처럼

이중 셋째 구절이 가장 중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일에 집중하다 보면 저절로 돈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후배들이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의지와 함께 좋아해서 하면 행복해지는 그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일인자가 되길 바란다”

글=박이은경 편집국장pleun@

사진=이기태 기자 lee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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