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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반씨는 “아이들 마음에 남은 상처가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5년도 아니고 23년을 살았습니다. 참고 살다 그 사람 아내로 죽고싶지 않아서, 인간으로 살고 싶어서 재판을 건 것인데…”

2005년 4월 15일 서울동부지법에 가정폭력 고소사건 증인으로 출석, 사인을 하던 도중 남편 황모(50)씨가 휘두른 칼에 찔려 머리와 손 등에 부상을 당한 반모(51)씨는 사건 당시의 충격을 애써 잊은 듯 어렵게 입을 열었다.

23년간 구타를 당하다 어렵사리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 청구소송을 진행 중인 반씨는 이날 사고로 인해 오른 손 인대가 끊어지고 머리 두피가 30㎝가량 절단돼 봉합 수술을 받는 중상을 입었다. 현재 충남의 한 병원에서 7일째 입원 치료 중인 반씨는 심경이 많이 정리된 듯 차분한 모습이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다고 항상 얘기했습니다. 최소한 법원에 청원경찰 한 명은 있었어야 하지 않나요. 증인으로 나오라고 한 검사나 변호사 모두 법정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반씨는 23년 동안의 고통을 뒤로 한 채 자신을 법정에 서게 한 검사, 변호사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반씨는 2000년 남편의 폭력을 피해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딸을 데리고 쉼터를 전전하는 등 폭력에 늘 노출되어 왔었다. 남편 황씨는 성격장애로 정신병원에 1년 반 동안 입원해 있었는가 하면 심할 때는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차에 밧줄과 휘발유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반씨는 결혼 초부터 “'아이 하나 더 낳으면 나아지겠지''경제적 기반 좀 마련되면 괜찮겠지'하며 10년을 버텨왔다”고 전했다. 1년 반 가까이 끌어 온 이혼 소송에 대해서도 “재판이 7회까지 왔다. 빨리 끝났으면 남편도 단념했을 텐데 너무 억울하다”며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씨의 곁에는 그와 같이 가정폭력 피해를 경험한 자원활동가들이 반씨를 간호하고 있었다. 기자와 함께 병원을 찾은 충남가족복지센터 신민자 사무국장은 “폭력 사건은 통상 증인이 안 나가는데 담당 검사가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너무 모른다”며 “사건이 터지고 나서도 전화 한 통 없다”고 전했다.

당시 법정에는 구속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도관이 없었고 법정경위 이모씨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남편 황씨를 살인미수로 기소할 예정이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자로 또 한번 피해를 본 반씨는 “아빠는 살인미수고 엄마는 병원에 있다”며 “진즉 사회적으로 규제해 줄 수 있는 법이 있었어야 하지 않으냐”며 울분을 토했다.

“이제는 너무 기막히니 분노도 없습니다. 애들과 마음 편히 밥 한 끼 먹고 싶을 따름입니다. 너무 긴 세월을 이렇게 살다 보니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심정이에요”

반씨는 병실로 돌아가며 “앞날이 걱정된다. 경제적으로 바닥이 났고 애들 마음의 상처도 너무 깊다”며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했다.

한편 충남가족복지센터는 반씨 사건과 관련, 담당 검사의 안일한 대처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다.

사건일지

▲3월 20일 서초동 법원 이혼가사사건으로 법원에 출두, 남편이 법정 안에서 접근하려는 것을 상주 청원 경찰이 제지

▲4월 11일 반씨에게 가정폭력 사건 담당자가 4월 15일 법정에 출두하라고 이야기함

▲4월 13일 반씨가 담당검사에게 신변에 위험이 있을 것 같아 출두할 수 없다고 하자 검사는 남편과 시간을 엇갈려 오고 증언을 하고 나면 남편을 보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함

▲4월 15일 반씨가 재판이 열리기 한 시간 전에 담당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신변이 위험하니 신변보호를 해 달라고 하자 담당 검사는 증인이 출두를 하지 않아 재판이 진행되지 않는다며 “법정에서 어떻게 하겠어요”라고 말함

▲4월 15일 오후 3시 서울동부지법3호 법정에서 열린 가정폭력 고소사건에서 남편 황모씨가 반씨를 뒤에서 칼로 찌름

임인숙 기자isim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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