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이만큼 살아오면서 부부 간에 흉을 보고 잡힐 일이 어디 한두 가지랴만 내가 잡힌 흉 가운데 하나가 로또다. 나는 로또 중독자이다. 로또가 생긴 이래 초반기의 잠깐을 빼고 거의 매주 로또를 산 전력이 있으니 그렇게 불릴 만하다.

이런 내가 남편 눈에는 아주 우습게 보이나 보다. 처음부터 확률이 몇 백만분의 일인지 아느냐,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먹으라고 말리더니 내가 굳건히 밀고 나가자 당신이 그렇게 허황된 사람인지 몰랐다며 깊이 실망하다가 겨우 체념하는 눈치였으니. 두 아이는 나의 강권(?)에 밀려 초반기에 딱 한 차례씩 사 보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엄마 닮지 않아서 참 쿨하기도 하지.

사실 나는 일생 동안 주택복권 한번 사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무슨 특별한 소신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 도대체 제비뽑기라는 건 나하고 상관없다는 걸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할 때도 그 많은 쪽지가 내 눈에는 단 한 장도 들어온 적이 없으려니와 반 이상이 당첨된다는 동네 슈퍼마켓 경품추첨에서조차 한번도 뽑힌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로또는 웬일이냐고? 고령화 사회를 맞아 고민 끝에 생각해낸 처절한 배수진이냐고? 글쎄, 그런 꿍심도 팔백 만 분의 일쯤은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나의 로또중독에는 심오한 철학이 깔려 있음을 지금 이 자리에서 감히 고백하는 바이다.

정부에서 로또를 시행한다고 했을 때 거의 모든 대중매체에는 반대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사설을 통해서건 외부 필자의 글이건 인터넷 댓글이건 한결같이 로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쏟아내었다. 좋은 일에 쓸 기금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정부가 나서서 전 국민의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주장은 나도 적극 수긍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좀 황당하게 들리는 주장이 있었다. 로또가 국민들 사이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한 사람이 몇 십억에서 몇 백억 원을 타면 나머지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국민 전체를 위해 절대로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 이런 주장 한 편에선 또 외국의 역대 복권 당첨자들이 대박을 터뜨린 대가로 얼마나 불행해졌는가에 대한 갖가지 사례를 나열하기도 했다. 아마 낙첨자들이 느낄 위화감을 달래주기 위한 선심 차원이었을 테지.

나, 원, 참, 별 데다 다 위화감이란 단어를 들이대는 거 아냐? 난 공연히 열이 받쳤다. 지위를 이용해 얻은 정보로 위장전입해서 사들인 땅이 순식간에 폭등해 떼돈을 벌었다면 또 모를까, 누구나 똑같이 2000원(요즘은 1000원)으로 숫자 여섯 개를 사서 그 중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대박을 터뜨렸는데 무슨 얼어죽을 위화감이란 말인가. 그 정도로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국민이라면 일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 일 배가 아파서 어떻게 살겠어.

아무튼 사는 게 점점 심심해지는 판에 그렇게 이상한 오기까지 발동해서 로또와 사귀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던 짓이 아니라서 그런지 로또를 산다는 행위 자체가 영 쑥스러웠다. 길 건너 은행에서 로또를 판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차마 입에서 로또 주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돌아 나왔다. 그리곤 한동안 막내가 외출할 때마다 사달라고 부탁하는 술책을 부렸다. 물론 걸핏하면 빼먹고 그냥 들어와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뜻밖의 길이 열렸다. 친구가 꽃집을 하는데 로또를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송금이 번거로워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됐다. 그 후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판매소 아무 데서나 사곤 했는데, 이런 경사가 있나, 몇 달 전 우리 동네 상가 코너에 로또 판매소가 생겼다. 덕분에 최근에는 거의 거르지 않고 로또를 살 수 있다.

단골이 되다 보니 주인아저씨와 환담을 나누는데 그 기분도 꽤 괜찮다. 꼭 당첨되세요라고 인사하기에 당첨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아요라고 말하니, 아이고, 우리 마음 착한 아주머니 복 받으실 거예요라며 더블로 기원해 준다. 내가 어디 가서 마음 착하다는 칭찬 받아 보겠어?

얼마나 사기에 이렇게 장광설이냐고? 더도 덜도 아닌 딱 1만 원 어치지 뭐. 그럼 얼마나 벌었느냐고? 에이, 뭘 그런 걸 물으실까. 로또기금이 여성을 위해서도 쓰인다는데 그걸로 만족해야지 웬 욕심. 아, 참, 지난달에는 처음으로 숫자를 네 개나 맞혔더랬어. 물경 4만 8000원인가 탔는데, 세상에, 그보다 좋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이번 주말에는 혹시 알아,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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