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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유역에 피어있는 매화꽃.
섬진강 은빛 물결은 지금 찬란한 꽃 누리다. 남원에서 구례, 하동을 지나 광양에 이르는 도로변을 따라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 강이 서러운' 꽃! 꽃!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강바람에 흔들리는 매화와 벚꽃은 망각의 저편에서 낚아 올린 요사한 그리움. 무얼 망설이는가, 그대. 훌쩍 떠나고 볼 일이다. 봄이 꿈틀거리는 그 곳으로.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가고 마음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눈을 감습니다/ 아, 눈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 참을 수 없이 떨리는/ 이 까닭 없는 분노/ 아아, 생살에 떨어지는/ 이 뜨거운 꽃잎들”

- 김용택 시 '이 꽃잎들' 중에서 -

● 희거나 붉거나 파리한 꽃잎의 봄

봄의 섬진강을 여행할라치면 매화가 흐드러질 무렵이 진짜배기다. 흐드러지다? 이런 표현을 일상에서 사용할 때면 왠지 불안하다. 시기심 많은 군상들에게 현학적인 미사여구로 여겨지기 십상인 탓.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일단 섬진강변 매화마을에 가보면 알게 된다. 흐드러진 게 어떤 모양새인지, 얼마나 현실감 있는 낱말인지 금세 알고 만다. 산 아래 둔덕부터 능선을 타고 오르는, 온통 희거나 붉거나 파리한 꽃잎의 봄일지니.

매화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청매실 농원. 매실명인 홍쌍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매화단지를 가꾸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항아리 2000여 개가 열 지어 선 마당에서 향긋한 매실차로 단내 나는 입을 축인 후 입구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나선다. 이윽고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강 저편 산마루까지 매화구름이 하얗게 올랐다. 산 그림자를 담고 흐르는 섬진강의 고운 물빛과 살결을 어루만지며 감아 도는 푸른 바람은 또 어떻고. 산과 꽃, 강과 바람의 어울림이 다정하다 못해 서럽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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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나룻배.

문득 조선의 도학자 퇴계 이황의 고사가 생각난다. 퇴계는 매화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데 그의 매화 감상법이란 게 좀 희한하다. 달빛 아래서 매화나무 주위를 맴돌았으니 말이다. 대충 이런 그림이 아니었을까. 달빛은 사람을 쫓고, 사람은 매화를 쫓고, 순백의 꽃잎은 날리고. 마침내 옷 가득 향기 스며 달 그림자 몸에 닿을 제, 사랑이고, 이별이고, 기쁨이고, 슬픔이고 사라진 자리엔 뭉클한 그리움만 남았으리라. 이 대목에서 그가 추구한 이기일원의 도를 떠올리는 건 아무래도 분에 넘치는 억측일까.

“매화꽃 피면/ 그대 오신다고 하기에/ 매화더러 피지마라고 했어요/ 그냥, 지금처럼/ 피우려고만 하라고요” - 김용택 시 '그리움' 중에서 -

● 옛 시골 장터의 정취 그대로

매화마을에서 물 건너로 보이는 곳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화개장터다. 쌍계사에서 화개장터까지는 십리 벚꽃 길. 나는 그 길을 두둥실 떠다녔다. 물론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동으로 화개와 하동, 서로 구례와 광양이 모두 꽃 첩첩, 산 첩첩인 요즘이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은 더욱 치명적이다. 어쩐지 사람의 운명에 개입하고야 말 듯한 그런 아름다움이랄까. 김용택 시인의 '화사한 아픔'과 '까닭 없는 분노'가 예 이르러서야 '생살에 떨어지는 뜨거운 꽃잎'으로 만개해 있다.

화개장터는 해방 전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의 하나로 흥성거렸던 곳이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쌍계사 길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가위, 면경들이 또한 구례 길에서 넘어오고, 하동 길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수들의 김, 미역,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모여들던, 산협 치고는 꽤 성한 장이었다고 한다. 산업화를 거치며 양식 은어와 참게장을 판매하는 식당가로 변한 것을 지난해에야 복원해 전통 5일장의 맥을 잇게 했다(1일, 6일).

봄나들이 인파로 북적대는 5일장은 엿장수의 신명나는 솜씨 자랑에 국밥집이 들썩이고, 산나물, 도토리묵, 녹차 등의 특산품이 왁자지껄 흥정 속에 오가는 게 옛 시골장터의 정취 그대로다.

● 그리운 것들은 산 너머에 있다

섬진강 일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는 예로부터 주역의 대가, 선승, 역술가, 비결 신봉자들이 숨어들어 도를 닦는 장소로 유명하다. 나 역시 수해 전 백운산에서 의형들과 함께 '주역'과 '금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당사주가 낯설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각기 한학자요, 서예가였던 의형들은 '주역'에서 기원하는 인체 신비의 정수, '황금 꽃의 비밀'에 관심이 많았다. 신장의 수(水) 기운과 심장의 화(火) 기운이 만나면, 혼이 넋 가운데로 들어가 몸 속에 황금 꽃이 피고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도가(道家) 수련법 말이다.

반면 나는 '금강경' 쪽에 좀 더 끌렸던 것 같다. '모든 사물의 형상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면 그 즉시 부처가 되리라'는 금강경의 설법이 내게는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보고싶은 현실에 집착하는 세상사를 향해 던지는 '파상(破相:상을 깨뜨린다)'이란 화두. 이 얼마나 통쾌한 반전인가? 생각해 보면 그 유명한 백운산 계곡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깐 동안이나마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내게는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한 몫 챙기게 되면 얼른 산으로 들어갈 일이다. 그리운 것들은 산 너머에 있으므로.

[가볼 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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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4월 초에 열리는 화개장터 벚꽃축제가 볼거리. 쌍계사 야생차 밭은 세계 3대 야생차 생산지로 명성이 높다. 이곳에서 노고단 방향으로 향하면 이내 '지리산 온천지구' 하동마을 입구에 다다른다. 예서 구례 산동마을까지 4㎞구간은 지금 샛노란 산수유 천지다. 산동마을은 아예 마을 전체가 노란 구름에 갇힌 듯 발랄한 느낌. 산수유 터널을 이룬 S자형 돌담길이 인상적이다.

[웰빙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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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섬진강 물빛을 닮은 재첩국. 많이 자라야 어른의 엄지손톱 만한 크기의 재첩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경계에서 자라는 것이 상품. 시원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해독 효과는 물론 허한 기운을 보해주는 강장식품으로도 이름이 높다. 매화마을 청룡식당(061-772-2400), 광양읍 섬진강재첩(061-762-0686) 등이 유명하다. 섬진강 여행에 고로쇠 약수 또한 뺄 수 없다. 지리산 일대에서 받아내는 고로쇠 수액은 위장병과 신경통 등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9ℓ들이 한 통에 3만원 내외.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17번 국도-임실-춘향터널-남원-19번 국도-밤재터널-구례-861번 지방도-매화마을. 17, 19번 국도 모두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난 곳이다.

대중교통: 기차로 전라선 구례역이나 경전선 하동역 이용.

문의전화: 구례군(061-780-2227), 광양시(061-797-2363), 하동군(055-880-2341)

홈페이지: 구례군(www.gurye.go.kr)

광양시(gwangyang.jeonnam.kr)

하동군(www.hadong.go.kr)

글?사진=권경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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