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캐나다 토론토대 홍성
욱 교수가 부인 조영란씨와 편저
해 올 가을쯤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할 '페미니즘을 통해 본 과
학, 기술, 의학'에 수록될 내용
중 일부다. 홍 교수는 서울대 물
리학과와 동대학원 과학사 박사
과정 졸업후 수백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토론토대에 이례적으로
임용됐다. 그는 92년 미국의 과
학사학회상, 97년 기술사학회상
을 수상하는 등 주목받는 과학사
학자다. 또 미국의 유수대학과
연구재단들의 프로젝트들도 성공
리에 진행했다. 부인 조영란씨
역시 토론토에서 의학사 박사과
정을 밟고 있다.
'편집자 주'
한국인으로 첫 번째로 (양)의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 서재필이란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
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인
으론 첫 MD(medical doctor)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개업해서
(정치가로 고국에 돌아오기 전까
지) 당뇨병 전문의로 명성을 날
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사는 누구
인가? 놀라운 것은 한국 사람으
로 두 번째 의사가 에스더 박
(Esther K;IM Park, 1877-1910)
이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1900년 볼티모어에 있는 여자의
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
어 귀국, 10년간 수만명의 환자
를 돌보면서 보건환경 개선과 여
성의료인력 양성에 선구적인 역
할을 했다. 이 글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사료에 근거해서 에스
더 박의 생애를 조명하기 위해
쓴 것이다.
수간호사, 여학교 교장 배출한
개화한 집안
1877년 3월 16일에 태어난 박
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
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 알려진
바는, 본이 광산(光山)이고 그의
아버지가 1885년 한국에 왔던 감
리교 목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의 일을 도와주던
사람이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딸 넷 중 장녀였는데, 그의
자매중에는 나중에 세브란스 병
원의 수간호사가 되었던 사람도,
서울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여학
교의 교장이 된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가계엔 개화한 사람이 많
았다.
김점동의 집은 서울 정동에 있었
다. 집 근처에 감리교회 여선교
사였던 매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부인이 1886년 설립한
‘이화학당’이 있어서 점동은
이 학교에 들락거릴 수 있었고,
1886년 겨울 4번째 학생으로 이
화학당에 입학했다. 당시에 항간
에는 외국인 학교에 자식을 보내
면 외국인 선교사가 애들을 외국
으로 팔아먹는다는 얘기가 무성
했고, 선생들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부모를 만나서
이런 얘기가 사실 무근임을 설득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김점동
의 부모도 처음에는 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에 반대가 심했다고 한
다.
개교 초기의 이화학당은 학생들
에게 한글, 한문, 성경, 산수, 가
사를 가르쳤고, 해가 지나면서
고학년 학생에겐 영어와 영어로
수학을 가르쳤다. 김점동은 특히
영어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 집
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면, 이화학당이 “동해에 갇혀
있던 처녀”에게 “서녘에서부터
오는 새로운 문명의 바람”을 마
시게 하고, “갑갑한 장옷을 벗
어버리고 안방 구석을 떠나던
곳”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
다.
1890년 김점동은 그의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 버린 한 여자 선
교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로
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 William James Hall
과 결혼해서 R.S. Hall이 됨)라
는 미국 선교의사였다. 셔우드는
미국 펜실베니아 여자의대를 졸
업하고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봉
사활동을 펴다가, 동대문에 있는
보구여관(普救女館)이라는 부인
병원에서 진료와 수술을 담당하
기 위해 1890년 한국에 파견된
여의사였다. 셔우드는 당시 이화
학당을 다니던 학생중 두명을 뽑
아서 자신의 일을 돕게 했는데,
그 중 한명이 김점동이었다. 점
동은 영어가 뛰어나서 셔우드가
즐겨 통역을 부탁했지만, 의술이
나 약에는 관심이 덜했다고 한
다.
셔우드의 회고에 의하면 김점동
이 의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
지게 된 것은 1893년 초, 셔우드
가 언청이 수술하는 것을 목격하
면서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김점동은 자신도 언젠가 이런 수
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
고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그렇
지만 김점동이 의사가 되기엔 난
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
국은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도 여
자가 다닐 수 있는 의과대학이
없었던 것이 그중 하나였고, 결
혼의 압력도 또 다른 난관이었
다.
미국의 선교 여의사 홀부인에게
서 큰 영향
당시 조선에선 기생이 아닌, 심
신이 멀쩡한 여자가 나이 열여섯
될 때까지 결혼을 안하는 것은
개인은 물론 집안의 수치로 간주
되었다. 미국인이었던 셔우드 박
사조차 한국에 와서 독신으로 진
료활동을 하면서 주변의 이상한
시선을 의식할 정도였고, 그의
친구들은 그의 약혼자인 홀 박사
(1860-1894, 1894년 평양에 광성
학교를 설립한 사람)가 1891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녀에게 서둘러 홀과 결혼할 것
을 권고할 정도였다. (그녀는
1892년 6월 홀과 결혼했다).
한국의 이런 풍습을 잘 알고 있
었던 스크랜턴 부인과 셔우드는
박유산이라는 젊은이를 점찍어서
김점동과 그녀의 집에 혼사를 타
진한다. 박유산은 윌리엄 홀 박
사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선
교를 할 때 동행하면서 통역을
하고 그를 돕던 건실한 젊은이였
다. 한가지 문제는 그가 돈이 없
고, 조금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
다는 것이었다. 김점동의 어머니
는 이런 이유 때문에 결혼을 반
대했고, 갈등을 겪었다.
에스더 김은 1893년 5월 박유산
과 결혼, 서울과 평양에서 본격
적으로 홀 부인의 의료활동을 돕
기 시작했다. 1894년 11월, 발진
티푸스로 갑작스럽게 남편의 죽
음을 맞은 홀 부인이 남편을 기
념하는 병원의 기금을 모으기 위
해 미국에 잠시 돌아가기로 결정
하자, 에스더는 그에게 이 기회
에 자신도 미국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에스더에게 드디어 의
학을 공부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
한 홀 부인은 친구들로부터 에스
더와 박유산의 배삯을 모아서 이
둘을 미국에 데려간다.
1895년 1월, 에스더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뉴욕에 있
는 고등학교에 편입, 수학, 과학
과 라틴어 등을 배우기 시작했
다. 고등학교를 한학기 다니고
1895년 9월 그는 뉴욕에 있는 간
호학교에 입학했다. 박유산은 미
국에 도착한 이후 줄곧 부인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상투
를 튼 채 농장에서 노동을 했다
고 한다. 다음해인 1896년 9월,
에스더 박(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꾸었다)은 3백명
의 입학생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볼티모어에 있는 여자의과대학
이후 존스홉킨스 의대에 합류)에
입학했다. 에스더는 학기중엔 학
업에 열중하고 방학에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으며, 박유산은
부인과 떨어져서 뉴욕의 농장에
서 힘든 노동을 계속했다.
남편의 지극한 외조로 미국에서
의학공부
1898년 박유산은 볼티모어에 있
는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어 2년
만에 볼티모어에서 부인과 합류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 박
유산은 이미 폐결핵으로 몸이 심
하게 상한 상태였다. 그는 부인
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당시 결
핵에는 특별한 약이 없었다) 에
스더가 의학박사학위를 받는 졸
업식을 3주 남기고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1900년 6월 학위를 받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온 에스더는 24살
의 젊은 나이에 동대문의 구제병
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첫 열달 동안 환자 3천을 볼 정
도로 정열적인 의료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그의 개복수술은 “귀
신이 재주를 피운다”는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후 그는 평
양에 있는 홀 부인의 부인병원에
합류해서 진료와 계몽을 계속했
다. 그는 병원에 앉아서 환자를
보는 것 만이 아니라, 평안도와
황해도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
니면서 무료 진료를 강행했다.
엄동설한에는 나귀가 끄는 썰매
를 타고 다니면서 환자를 찾아다
녔다. 틈틈이 평양의 농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강의도 계속했다.
수년간 계속되는 과로로 심하게
건강을 해친 에스더 박은 1909년
잠시나마 건강을 회복하는데 성
공했고, 종전처럼 평양 병원에서
업무를 계속했다. 그 해 그는 하
한사, 윤정온과 함께 수천명의
하객의 축하 속에 고종황제가
‘신여성’을 치하하기 위해 수
여하는 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미 그때 그는 남편 박
유산을 앗아간 폐결핵이 회복할
수 없는 단계로 악화된 상태였
다.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기도
와 지속적인 투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병원에서 34살의 짧은 생애를 마
감했다.
1910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홀 부인의 아들인 셔우드 홀
(Sherwood Hall, 1894-1991)은
어릴적부터 이모처럼 따르던 에
스더가 결핵에 걸려 죽는 것을
보고 결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
어 한국에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결핵 퇴치에 앞장서겠다고 결심
한다.
그는 캐나다로 돌아가 자신의 결
심대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