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사람들이 너무 거칠다. 지하철역에서 남을 밀치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대학신입생의 군기잡기,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학적인 몸짓들,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들 간의 악다구니, 국회의원의 삿대질과 몸싸움 등

십여 년 전 뜻 맞는 사람들과 학부모운동단체를 만들면서 첫 번째로 추진한 운동이 체벌금지였다. 학교 측의 반발이야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우리가 놀랐던 건 같은 학부모들의 반응이었다. 수많은 학부모들이 '사랑의 매'를 옹호하고 나섰다.

개중에는 부모들도 손을 놓을 정도로 구제 불가능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치려는' 교사야말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정한 스승이라고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한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의 찬반을 조사했는데 거기서도 체벌을 찬성하는 쪽이 조금 앞섰던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교사의 감정이 배제된, 어디까지나 사랑이 앞선 매라는 조건이 달렸지만.

그러나 나를 비롯한 우리 회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교실에서 가해지는 체벌에 사랑이 깃들 여지는 이미 기대할 수 없다. 한 교사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서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될 뿐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이들 사이에서 고스란히 재생산되어 결국에는 우리 사회의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문화의 뿌리를 학교에서 찾자는 게 아니라 이토록 폭력적인 세상에서 적어도 학교에서만은 폭력 없는 문화를 맛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보면 학교에 너무 큰 것을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인 엄마의 순진한 소망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이미 교사의 매에 대해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만큼 폭력문화에 물들어 있었다. 교사의 체벌을 엄마에게 알리는 대신 매를 맞아 생긴 넓적다리의 피멍자국을 가리기 위해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어쩌다 피멍자국을 발견한 엄마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오버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의 매를 인정했느냐 하면 물론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됐건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한 미움을 어쩌지 못해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체벌을 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학생들은 그런 교사들을 미워하기보다 불쌍하게 여긴다고 했다. 아마도 생활이 고달픈 모양이라고, 그래서 만만한 애들한테 스트레스를 푸는 모양이라고. 정말 좋은 교사들은 절대로 매를 때리지 않는다는 게 아이들의 믿음이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이 '사랑의 매'라는 이름을 붙인 회초리를 학교에 바치는 해프닝까지 있었지만 아무튼 지난 십여 년 동안 교사의 체벌은 점점 줄어든 게 사실이다. 어느 새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확산된 덕분인지, 아니면 금쪽 같은 내 새끼를 누가 감히 때리느냐는 어버이사랑이 무서워져 갔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최근 갑자기 학생 사이의 폭력이 큰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거의 조직폭력배 수준의 폭력행태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한 교사의 발표가 기폭제가 되었는데 사실 학교 폭력문제는 하루 이틀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20년 전에도 학교 주변에서 '형'들에게 돈이나 옷, 운동화를 빼앗긴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부모와 학교, 그리고 사회 모두가 제때 제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대신 덮어두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부모는 아이들이 더 큰 피해를 당할까 두려워서, 그리고 학교는 학교대로 소위 평판을 걱정해서, 사회는 애들 사이에 있을 수도 있지 뭐 그깟 일로 수선을 피우느냐는 식으로 문제를 축소해 왔다. 게다가 당하는 아이들에게는 당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의 논리가 암암리에 먹혀들어 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학교 폭력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 만연한 폭력문화이다. 아이들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데는 그만큼 우리의 일상이 폭력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제도 아파트 마당에서 일곱 살쯤 된 딸을 야단치는 엄마를 보았다. 단지 빨리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 엄마의 말과 표정은 대역죄를 지은 죄인을 다스리는 듯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거칠다. 지하철역에서 남을 밀치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대학신입생의 군기 잡기,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학적인 몸짓들,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들 간의 악다구니, 국회의원의 삿대질과 몸싸움 등….

나의 마지막 소망. 좀 부드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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