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한 여성캐릭터 탄생

김지수의 섬세한 동작연기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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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를 보다 보면 두 번 놀란다. 한 번은 근래 한국영화 중 보기 드문 여성주인공의 캐릭터가 갖는 정교함에 놀라고, 이거 틀림없이 여성감독의 솜씨다 싶어 감독프로필을 뒤적이다 보면 이윤기라는 남성감독의 이름에, 남성감독이 만든 여성영화의 치밀함에 놀라게 된다.

일단 '여자, 정혜'에서 김지수는 표정으로 연기하지 않는다. 동작으로, 작은 손짓 하나로 내면의 결이 자연스럽게 스크린에 흘러 들어가게 연기한다.

제목의 '여자'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그곳엔 사회문화학적인 현상으로서의 '여성'보다는 자연인에 가까운 '인간'이 존재한다. 홈쇼핑을 보고, 김치를 사먹고, 그 사먹은 김치를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시 그 손으로 정성스레 제 물건을 닦고. 그리고 바로 그 여린 손이 바르르 떨 때, 그곳엔 적어도 자신의 삶은 스스로가 추스르려 노력하는 대한민국 미혼 여성들이 겪는 사소한 일상과 아픔들이 바늘땀처럼 촘촘히 숨겨져 있다.

그러니까 이 남성감독은 현명하게도 자신이 그려낸 여자를 그저 지켜보는 편을 택한다. 전적으로 그 여자의 내면의 풍경화에 초점을 맞추는 편을 택한다. 여자를, 여성을, 안다고 말 하지도 않고 주인공을 추월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무심한 듯 흘러가는 한 여자의 외면을 파열시키는 기억, 떠오르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그 무의식적 기억을 무던히도 차분하게 세밀화의 솜씨로 잡아내려 든다.

일례로 정혜는 상사의 병문안 차 찾아간 병원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고, 운동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 구두에 묻은 얼룩을 보고 문득 신혼여행에서 첫날밤을 치르다 그냥 돌아와 버린 사건을 기억해낸다. 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자꾸 이 여자, 정혜를 흔들어 놓을 때 마침내 아주 천천히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이 식물적인 여자의 뿌리 깊이 심어 있는 상처와 외로움이 얼마나 깊고 질긴 것인지 새삼 재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성감독이 만든 또 다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와는 또 다른 감흥으로 여성이 '여자'가 아니라 온갖 변칙적인 남성 판타지의 '대상'이 되는 상업영화들 속에서 '여자, 정혜'는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그 결은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내려쓴 내 친구의 글씨를 볼 때처럼, 바르고 곱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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