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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소재 영화 '그때 그 사람',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 등 박정희 철권 통치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주변을 떠나지 않고 세인의 관심을 그에게 묶어두고 있다. 그러나 올해를 그는 감연히 '역사적 사건에서의 해방 원년' 이라 주저치 않고 부른다. 사진=한명구 객원기자

오십 고개에 노래 인생 25년, 열 번째 앨범 '꽃'을 들고 온 심수봉은 더 이상 '그때 그 사람'이 아니었다.

“올해에야 비로소 내 삶에 무겁게 드리웠던, 그러나 내 책임은 아닌 그림자를 다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사건(10·26) 이후 한국에선 계속 환영 못 받고, 억압 많이 받으며 음악생활을 한 사람이 됐어요…'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툭 하면 방송 금지나 당하고. 방송국이 폭력집단으로까지 느껴졌으니까요. 이젠 '선생님' 예우도 받죠. 지난번 어떤 팬의 노란 봉투를 받아들고 한동안 마음이 찡했어요. 그 안엔 '심수봉씨는 한동안 우리 곁을 떠나있었을지 몰라도 우린 한 번도 당신 곁을 떠난 적이 없답니다'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거든요. 앞으로 다시는 대중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TV나 라디오나 나를 대중 앞으로 부르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달려갈 생각이랍니다”

10·26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개봉된 데다가 한·일협정 비밀문서 공개, 광화문 현판 교체 등의 사건으로 박정희 철권 통치의 기억이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지는 때라 그는 지난 연말 새 앨범 발표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올 을유년이야말로 스스로 '(역사적 사건에서의) 해방 원년'이라 칭하는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기나 긴 설 연휴 직전인 2월 7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그와 마주한 2시간은 이 수수께끼를 풀기에 충분했다.

'남자의 나라' 노래로 가부장성 신랄히 꼬집어

이번 앨범에서 음악프로그램 PD 출신인 남편부터 음반 프로듀서까지 다 반대했는데도 기어코 고집을 부려 그가 집어넣은 '남자의 나라'. 이 곡은 그에게 '시작'을 의미한다. 그는 가사 첫 줄을 늘 마음먹고 있었던 '우리나라는 남자들의 나라다'란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남자의 여자로 길들여진 척박한 이 땅').

“주변을 봐도 예외가 없죠. 전문직 여성으로 지금까지 약사로 일하고 있는 시어머니부터 가부장적 남자와 결혼해 십수 년을 가정부처럼 헌신하다 거의 빈털터리로 이혼당한 친척 동생에 이르기까지…여성에 대한 가정과 사회의 부당한 처사에 거의 분노를 느낄 정도였어요. 게다가 이 곡은 지난 2년간의 미국 경험을 통해 세계적 감각에도 손색없는 곡을 만들고 싶은 내 희망의 포석 같은 곡이에요. 그래서 이제까지 내 곡들 중 음악적 퀄리티(quality)가 가장 높은 곡이기도 해요. 해금, 태평소, 꽹과리가 동원된 사물리듬의 국악에 재즈를 접목시켰죠. 이 곡을 만들면서 한국적인 것을 곧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란 순간적인 영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의 변화 이면엔 사회적 변화와 내면의 변화가 함께 자리한다. 그 스스로 자신의 음악 활동을 “겨우 숨 쉬듯이 음반을 발표하면, 늘 대중이 호응해줘 대중에 의해 존재할 수 있었던, 그리고 대중이 밀어준 가수”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제까지 그에겐 변변한 매니지먼트 지원조차 없었다. 10집 앨범을 내고서야 처음으로 20대 남자 매니저를 기획사에서 배정해줬다. 방송 출연에서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게 됐기 때문에 스케줄 조정이 필요해서다.

작년말 5년 공백 깬 콘서트 4회공연 매진에 감동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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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5년여의 공백 끝에 열린 콘서트에서 심수봉씨는 열창을 거듭, 새로운 노래 인생을 예고했다.

그는 지난 연말 성균관대에서 5년간의 공백을 깨고 연 자신의 콘서트가 4000석 규모의 4회 공연이 전석 매진되는 것을 보면서 대중의 사랑과 자신의 저력을 재확인했다. 콘서트 명처럼 그야말로 '어느 멋진 날'이었다. 그런데 이 '어느 멋진 날'의 태동은 이미 3년 전에 시작됐다. 2002년 훌쩍 떠나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서 전세계 음악인들과 마음껏 교류하며 “완벽하게 모든 것을 흡수했던” 지난 2년간의 미국 체류가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남자의 나라' 속 '선녀'처럼 십여 년을 '나무꾼'에게 완벽히 봉사했으나 일순 허무함을 느낀 한 사건에서 꿰어졌다. 어느 날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해 대접하는 와중에 남편에게 전기밥솥에서 밥을 푸는 부탁을 했다가 남편이 한 공기도 채 못 푸고 “이건 너무하다”며 밥 주걱을 턱 놓는 바로 그 순간 “일순간에 심신이 많이 지쳤다고 실감하면서 회의가 몰려왔다”는 것. 그래서 그는 “선녀는 떠났다 사슬을 풀고”란 노랫말처럼 “나무꾼의 나라가 변하기를” 기대하며, 또 재충전을 기대하며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11년전 음악 PD와 재혼 호주제 폐지 나에겐 축복

“이제 재혼 11년 차예요. 싱어송 라이터면서도 가정사를 잘 챙기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동안의 결혼생활에서 남편에게 바란 건 딱 한 가지뿐이었어요. 일요일 아침만은 나도 식구들 먹을 것 신경 안 쓰고 좀 쉬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남편이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차라리 아침을 굶어버리더라고요(웃음). 95세 시할머니를 필두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접하면서 처음엔 남편의 가부장적 성향이 '대물림'인가 했는데, 미국 생활 중 많은 가정들을 보면서 이건 한 개인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 결론 내렸어요. 한 마디로 한국 여자들이 속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가 최근 잘된 일이라고 가장 기쁘게 손꼽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위헌판결과 목전에 다가온 호주제 폐지 움직임이라고 한다. 그 자신 재혼 때문에 전 결혼에서 얻은 큰아들과 남편 사이의 불편함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그는 군복무 중인 큰아들,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 둘째 아들에 첼로를 전공 중인 17세 딸을 두고 있다. 특히 그의 딸은 그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전통 음악학도(피아니스트)의 길을 가려다 경영학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대학가요제를 통해 촉망받는 가수로 데뷔했다가 역사적 파고에 휩쓸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꿈을 자제해야 했던 그로선 딸을 통해 “상처받지 않고, 꼬이지 않고, 즐겁게 엔조이(enjoy)하며 음악을 해야 한다”는 소신을 매번 확인하고 있다.

“간혹 어떤 사람은 그러더군요, 내가 10·26을 이용해 음반 3만장을 팔았다고요. 난 절대 정치적이지도 않고, 그 사건을 이용할 사람도 못 돼요. 그래서 되묻곤 하죠. 심수봉이 10·26 때문에 가수활동을 한 사람이냐, 오히려 10·26이 일생 가수활동 걸림돌로 내내 날 괴롭히지 않았느냐고”

디너쇼 등 1년 스케줄 빡빡 3월엔 일본무대 진출도

그에겐 이미 올 1년 콘서트와 디너쇼 스케줄이 다 잡혀있는 데다가 3월엔 일본에서 자신의 히트곡을 중심으로 한 싱글 앨범 발매에 이어 가스펠 앨범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 10집 앨범 발매 후 전략 곡으로 내세운 김소월 시의 '개여울'이 호응을 얻는 가운데 그는 최근 재미난 경험을 했다. 음악 전문채널 M-TV에 '진짜 원로가수' 기분으로 출연했는데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부르자 10대 관객들이 일제히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호응을 해줬다. 세대와 연령을 초월해 팬 층을 두텁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엿보았다.

“노랫말을 쓰는 사람으로서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사'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공감하고,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가사, 시대 흐름을 관통하는 가사가 좋겠죠. 무엇보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곧 '사랑'이겠죠? 비록 3분 내지 5분짜리 대중가요에서도 사람들은 가슴 저미는 위로에 젖어드니까요.”

상앗빛 그랜드 피아노 앞에 하늘색 원피스 차림으로 앉아 '그때 그 사람'을 능숙하게 불렀던 스물 세 살의 심민경. 이후 마치 그의 험난한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도를 이루라'는 뜻으로 한 스님으로부터 '심수봉'이란 '굉장히 센' 이름을 받았고, 한편으론 독특하다는 평을, 한편으론 고답스럽고 투박하다는 평을 들으며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켜 왔다. “이름도 그 사람의 성장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는 그의 냉엄한 소신이 앞으로 제2의 노래인생 앞에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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