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정법대학장

꽉 차 있기보다는 속이 비어 있어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큰 항아리 같아야 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통치할 자격이 있는 가이다. 통치자란 말이 대중적 민주주의에 모순되는 보수적 개념 같지만 자질 없는 사공이 많아 정치의 멋이 망가진 시대에 한번쯤 그려보고 싶어진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은 통치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길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언제 무엇을 어떤 순서로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통치자는 사기와 위선으로 재주를 부려서는 안 된다. 훌륭한 통치자는 이제껏 사람들이 자기들 능력 밖이라고 생각해 왔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바라만 보던 것을 목표로 제시하여 의아해 하는 사람들로부터 감추어진 그들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하도록 끌어가는 사람이다.

통치자는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고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통치자는 국민 능력의 상징이며 국가의 대표 인격이다. 통치자는 어떤 의견이든 들을 수 있는 큰 항아리 같아야 한다.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기보다는 속이 비어 있어 소리가 모아져 청명한 소리가 나오는 항아리 같은, 어떤 것이든 담아내서 한두 가지가 삐죽 나오게는 만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칼날 같은 혀를 가진 비판자형이나 만사를 초연하게 보는 도사형은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야망을 갖되 그것이 국가와 역사에 빛나는 것이어야 하고 효율성을 추구하되 얻는 자와 잃는 자의 간격이 극단적이어서는 안 된다. 전임자들에 의해 이미 역사의 부분이 된 것을 부정하여 자기 것을 더 크게 보이게 하려는 교만함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전임자들의 업적을 부수거나 외면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최대한 현명하게 이용하는 지혜가 받쳐주는 권력이어야 한다.

통치자는 우수하나 겸손해야 한다. 역할 분담이라는 면에서 보면 통치자는 황제든 대통령이든 한 사람의 공무원일 뿐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가와 국민의 체면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자기가 통치할 때 과오가 없다면 그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야 하며, 선배가 벌여놓은 일의 좋은 결과 덕이거나 후배가 짊어질 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느끼고, 스스로를 늘 평가하며, 선후배들의 눈으로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역할을 비춰보아야 한다. 거만한 통치자는 자기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

통치자는 자기체면 때문에 남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통치자들은 정적들의 공격을 막아주고 자기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의리 군단이 든든할수록 의기양양할 수 있다. 그런 통치자는 비겁하다. 당당하게 책임질 줄 아는 사람에게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 것이며 권력과 위신 그리고 영예는 결코 자기 이외의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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