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음식쓰레기 분류기준을 만든 사람들은 정말 자기 손으로 살림을 해 본 사람들일까? 조만간 엄청난 쓰레기 쓰나미가 우릴 덮치는 건 아닐지 심히 걱정된다

모처럼 집에서 저녁을 해 먹기로 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개기다가 막상 나가자니 그게 더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그냥 간단하게 된장찌개나 끓여 먹지 뭐 하고 냉장고니 다용도실을 뒤졌더니 다행히 연말에 사 놓았던 밑채소들에 애호박까지 두루두루 갖춰져 있었다.

감자와 양파, 대파, 그리고 마늘을 깐 껍질들을 무심코 한꺼번에 뭉쳐 음식 쓰레기 봉투용으로 쓰는 비닐봉투에 넣다가, 아차, 이게 아니지 싶었다. 바로 며칠 전 양파와 마늘 껍질과 대파 뿌리는 음식쓰레기가 아니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야 이건 정말 까다로운 분리법이군 하며 픽 웃어 버렸는데 정작 거기에 해당되는 쓰레기가 나오니까 바짝 긴장이 되는 거였다. (몇 십 년 동안 몸에 밴 모범생 기질이 어딜 가겠어?)

신문더미를 뒤져 기사를 찾아 꼼꼼히 읽어보았다. 와∼내 기억이 맞았다. 35년 역사를 자랑하는 주부의 직업적 본능이 최근 나날이 위세를 더해 가는 막강한 건망증을 당당히 이겨낸 거다. 음식쓰레기 봉투에서 양파껍질을 집어냈더니 종잇장 같은 겉껍질과 물컹물컹한 속껍질이 한 데 붙어 있다.

싱싱치 않던 거라 많이 벗겨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떡하나, 조심조심 두 개를 떼어놓느라고 애먹었다. 또 대파도 사 놓은 지 오래 된 거라 상당 부분이 딱딱해졌기 때문에 뭉텅 잘라서 버렸는데 여기서 뿌리만 따로 떼어버린다는 것도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세심한 손놀림이 필요한 일엔 워낙 젬병인 나는 와락 짜증이 났다. 아니, 양파껍질이나 파뿌리가 왜 음식쓰레기가 아니라는 거야? 그것도 다 약으로 쓴다던데. (바로 얼마 전에 누군가가 양파껍질을 모아서 달여 먹으면 굉장히 좋다고 권했었다. 어디에 좋다고 했는지는 금방 잊어 버렸지만)

환경부의 음식 쓰레기 분류기준에 따르면 동물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음식 쓰레기이지만 흙이 묻었거나 바짝 마른 건 음식쓰레기가 아니라는데 요즘 슈퍼마켓에서 파는 대파 뿌리에 무슨 흙이 묻어 있담. 아무튼 나는 계속 구시렁거리면서도 마늘껍질까지 하나하나 잘 골라서 일반 쓰레기통에 넣었다. 내가 뭐 정부가 하래서 하나. 지구를 지키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까 하는 거지.

그런데 저녁반찬으로 맛있게 구워 먹은 조그만 굴비 찌꺼기를 치우다가 또 헷갈렸다. 분명히 생선뼈는 음식쓰레기가 아니라고 했겠다, 그럼 이 딱딱한 생선대가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꼬리지느러미도 만만치 않게 딱딱한데 말이야. 고작 두 마리 갖고도 이런데 생선구이집에선 정말 장난이 아닐 거야. 알바생을 따로 둬야 할 걸.

내친 김에 저녁 설거지도 미뤄 놓은 채 나는 본격적인 연구자세로 돌입했다. 뜯어 보면 볼수록 흥미진진한 분류기준이었다. 아, 생강 껍질은 흙 때문에 안되는구나. 그런데 대부분의 주부들은 일단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껍질을 벗길 텐데. 그래도 음식쓰레기에 안 속하나? 아니, 이런 이런! 달걀이나 오리알 메추리알 껍질은 왜 음식쓰레기가 아닐까? 영양분이 많아서 동물의 사료로 써도 좋을 것 같고 퇴비로는 더 좋을 텐데. 달걀이나 오리알은 혹시 너무 딱딱해서 그렇다 치고 메추리알 껍질은 손만 대도 부스러질 만큼 연하잖아. 내가 모르는 무슨 심오한 이유가 있나 본데 그게 과연 뭘까.

그리고 땅콩이나 밤의 껍질이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는 물론 속껍질까지 다 말하겠지?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이유일까, 각종 차류와 한약재의 찌꺼기도 음식쓰레기가 아니라는 건? 녹차 먹인 돼지고기니 한약 먹인 소가 좋다고야단들이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녹차 찌꺼기는 사람이 먹어도 좋다잖아.

아이쿠, 머리 아파. 그러기에 그냥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따지긴 왜 따져. 처음엔 좀 번거로워 보여도 금방 익숙해질 텐데. 이런 게 다 살림의 기술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이런 분류 기준을 만든 사람들은 정말 자기 손으로 살림을 해 본 사람들일까? 혹시 커다란 나라살림에 신경 쓰느라고 소소한 살림의 기술 따윈 우습게 보는 건 아닐까?

그리고, 더 큰 의문 하나. 우리야 이렇게 열심히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살림의 기술을 쌓아 간다지만, 우리 코앞의 저 거대한 나라에서는 과연 어떻게 하고 있을까. 조만간 엄청난 쓰레기 쓰나미가 우릴 덮치는 건 아닐지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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